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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박물관 '평강 채씨 문장가들' 특별기획전 열려
평강 채씨 가문의 내력인 족보, 문장가, 후손들의 혼서, 유물 등 전시
2024-01-15 17:43:52최종 업데이트 : 2024-01-15 17:43:50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채제공 65세때 금관조복본 전신초상

채제공 65세때 금관조복본 전신좌상 초상


수원화성박물관은 '수원유수부 승격 230주년'을 맞아 초대 수원유수를 배출한 평강 채 씨 가문의 기증 유물을 조명하는 특별기획전을 열었다. 특별기획전은 평강 채 씨 가문의 족보 발간, 평강 채 씨 문장가들, 평강 채 씨 가문의 보물, 채제공의 초상, 조상을 기리는 영당 건립과 배향, 평강 채 씨 가문의 생활문화 유물 등으로 구성되었다. 

족보(族譜)는 한 가문에서 나라에 업적(관직)이 있는 조상을 추앙하고 대대로 내려온 가문 구성원들의 혈통과 계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기록한 책이다. 반상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서 족보는 사대부들의 혈통과 계보를 보존하는 전유물이다. 그 당시 서민들은 족보가 없었다.

 

평강 채 씨의 족보 다섯 번째로 간행된 '평강 채 씨 족보'는 소감공파의 문장(門長)이었던 채석영(蔡石永1850-1928)등이 목판각 활자를 이용하여 1898년(광무 2년) 9책으로 간행한 '무술보(戊戌譜)'다. 간행장소인 향림(香林)은 전북 군산시 임피면으로 시조인 소감공(少監公) 채양생(蔡陽生)의 재실이 있던 곳이다.
 

평강 채씨 족보를 간행한 목판각 활자

평강 채씨 족보를 간행한 목판각 활자


평강 채 씨는 강원도 평창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다. 감찰규정(監察糾正) 채경연(蔡敬延)의 현 손이며 고려 고종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채송년(蔡松年)을 시조로 한다. 평강 채 씨 가문에서는 1661년(현종 2)에 발간된 신축보(辛丑譜)부터 1921년 신유보(辛酉譜)까지 6종류의 족보가 발간되었다. 
 

평강 채씨 족보 신축보 1책

평강 채씨 족보 신축보 1책

 

평강 채 씨 가문의 대표적인 문장가로는 번암 채제공을 비롯해 호주 채유후와 희암 채팽윤씨 등이 있다. 이들은 평강 채 씨를 대표하는 문장가이며 생전에 쓴 글을 후손들이 문집을 간행하였다. 평강 채 씨 소감공파(少監公派) 가문의 대표적 문장가로는 호주(湖洲) 채유후(蔡裕後1599-1660) 와 희암(希菴) 채팽윤(蔡彭胤1669-1731)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 등이 있다. 

 

채유후 선생은 조선후기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인조신록', '선조수정실록' 편찬을 감수했으며 '효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채제공의 종고조부로 문재(文才)에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채팽윤 선생은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채제공의 종조부이자 스승이었다. 1692년 1694년 숙종에게 올린 13편의 응제시문을 모 은'응제시첩'이 남아있어 채팽윤 선생이 지은 시를 살펴볼 수 있다.
 

채유후 성생의 호주집

채유후 선생의 호주집


채팽윤은 종조부인 호주 채유후의 문집 '호주집'을 작성하였으며 채제공은 채팽윤의 '희암집' 간행을 기획했다. 이렇듯 평강 채 씨 가문의 문집발간은 채유후에서 채팽윤, 채제공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문장가들이었다. 

번암 채제공은 1793년 초대 수원유수로 임명되었으며 수원화성 축성을 총괄하는 총리대신을 맡아 그 임무를 완수했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었던 채제공은 72세 때인 1791년(정조 15) 그동안 자신이 지은 시문을 정리해 묶었다. 채제공의 글을 모은 문집'번암집'은 이후 영남 남인들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1824년 안동 봉정사에서 간행됐다.
 

번암 채제공의 번암집

번암 채제공의 번암집


채제공의 관복을 입은 초상화 금관조복본, 흑단령포본, 시복본 등 다양한 옷차림의 초상화가 보존돼 전시중이다. 이는 평강 채 씨 가문의 보물이다. 2006년에 시복본초상(채호석기증) 2020년에 금관조복본, 흑단령포본(채하석 기증)이 차례로 수원화성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초상화를 보관할 때 쓰였던 보자기와 함도 함께 전시되었다.

 채제공 73세때 시복본 초상

채제공 73세때 시복본 초상

                         
조선시대에는 공자(公子)의 유가사상(儒伽思想)을 정책지표로 삼고 조상에 대한 효를 중요시했다. 공자가 효를 제1덕목으로 알린 가르침은 "조상님 살아계실 적에 예(禮)로 섬기고, 돌아가신 후에 예로 장사 지내며, 예로 제사 지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유교적 사상 때문에 옛날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평강 채 씨 가문에서는 채제공 초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영당을 지어 상의당으로 지정하였다. 채제공을 배향(拜香)할 때 쓰였던 제기와 교의, 감실, 제상, 향상도 수원화성박물관에 기증되어 전시되었다.
 

평강 채씨 문중이 상의당에서 호주 채유후 희암 채팽윤 번암 채제공 제향을 올리는 모습

평강 채씨 문중이 상의당에서 호주 채유후 희암 채팽윤 번암 채제공 제향을 올리는 모습

채제공 배향할때 제기 등 제사상

채제공 배향할때 제기 등 제사상


평강 채 씨 가문의 유물 중에는 가문의 일생의례와 생활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일생의례는 관혼상제(冠婚喪祭)등의 의례를 의미하는데 일생의례 중 혼례는 집안의 중요한 행사로 평강 채 씨 집안에 혼서(婚書)는 다른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인맥을 보여주는 자료다. 하동 정 씨, 전주 이 씨, 여주 이 씨 와 평강 채 씨 가문의 자제들이 혼인할 때 주고받은 혼서도 전시되어 요즘의 약혼식과 같은 당시의 예물단지와 함께 보낸 혼인 서약 문서다.
 

평강 채씨 채석영 후인 경주 이씨 혼서

평강 채씨 채석영 후인 경주 이씨 혼서


조선시대에는 반상제가 엄격한 때라 양반과 중인, 천민(賤民 일명 상놈) 자녀들의 혼인 명칭까지 차별화했다. 혼인은 가문의 인맥을 형성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자녀들 의사와는 무관하게 부모들이 결정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법도였다. 남녀가 유별하니 당사자들은 얼굴도 모른 채 혼인날에야 신랑신부 맞절하면서 겯눈질로 겨우 얼굴을 마주할 수가 있었다. 

 

사대부들은 정략 혼인이 다반사였다. 자녀들 혼기가 되면 매파를 통해 먼저 가문을 알아보고 비슷한가문이나 나은집안 가문을 찾아 혼인을 했다. 이때는 빛날 화(華) 혼인할 혼(婚) 자를 써서 '華婚'이라고 했다. 권력있는 사대부들의 두 집안이 합쳤으니 가문이 더욱 빛이 난다는 의미다. 중인들의 자녀가 혼인을 할 때는 성할 성(盛) 혼인할 혼(婚) '盛婚'이라고 했다. 혼인이 성사됐다는 의미다. 천민 자녀들의 혼인은 맺을결(結) 혼인할 혼(婚) '結婚'이라고 했다. 두 남녀가 인연을 맺었다는 단순한 의미였다.  

 

이렇듯 사대부들은 서민들의 혼인까지 차별화하면서도 혼인하는 신랑 신부에게는 특별한 관용을 베풀기도 했다. 혼인날 신랑은 사대부들이 궁중에서나 입고 쓰는 관복과 관모를 쓰고 신부는 궁중 혼례 때 공주나 옹주가 입는 홍장삼과 족두리를 쓰는 것을 허용했다. 서민들은 평생에 관직에 나갈 수 없으니 혼인식 때 일생에 한번 관복과 궁중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시혜를 베푼 것이다.
 

평강 채 씨 가문의 내력을 볼 수 있는 족보, '호주집', '희암집', '번안집'의 문집 간행물을 통해 평강 채 씨 가문에서 배출한 문장가들의 문학적 자질을 살펴보고 보물 채제공의 초상화 유지초본 등 희귀한 관련 유물들을 볼 수 있었다. 후손들의 문집, 혼인을 위해 작성한 혼서, 생활유물 등 자손 대대로 전해온 귀중한 유물들이 소개되어 이번 전시가 평강 채 씨 가문의 전승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필자가 관람하면서 2시간이 넘게 취재하는 동안 젊은 청년들부터 60, 70대에 이르는 중장년들까지 관람객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2023년 10월 5일부터 장장 100일간 열린 '평강 채 씨 가문의 문장가들' 특별기획전은 14일로 모두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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