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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의 꿈, 시에 담다’ 전시회 선경도서관에서 열려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 기념전
2024-01-15 14:01:33최종 업데이트 : 2024-01-15 14:01:17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선경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매헌의 꿈, 시에 담다' 전시회

선경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매헌의 꿈, 시에 담다' 전시회


1932년 4월 29일, 독립의 열망을 목숨과 바꾼 25세 청년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상하이 의거가 성공하기까지 윤봉길 의사의 저술 활동, 농촌 계몽운동은 식민 통치하에서 조국을 새롭게 건설하고자 고민했던 그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윤봉길 의사가 남긴 한시 300여 수는 그의 탄탄한 문학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혁명가의 이면에는 조선의 농촌과 농민을 사랑했던 시인이자 농촌개혁가였던 삶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해 단번에 상하이 의거를 성공시킨 단순한 독립투사가 아닌 삶을 살았다.

선경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매헌의 꿈, 시에 담다' 전시회

선경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매헌의 꿈, 시에 담다' 전시회


선경도서관은 '매헌의 꿈, 시에 담다'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 기념전시회를 열고 있다. 도서관 1층 로비에는 윤봉길 의사의 삶을 조명하는 '배우다', '눈뜨다', '행하다', '기리다', '퍼지다'로 구성된 패널이 전시되어 있다.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제작한 패널이다.

'배우다' 코너에서는 매헌 윤봉길(1908-1932) 의사의 어린 시절을 조명하고 있다. 6세에 큰아버지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익히고 11세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지만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교육을 거부하며 학교를 자퇴했다. 14세에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의 오치서숙에 들어가 한학을 익히며 고전과 시문을 수학하였는데 한시를 잘 지어 300여 수의 한시가 담긴 시문집을 남겼다. 동아일보와 개벽 등을 통해 신학문을 접하고 일본어를 배우며 자유를 잃은 민족문제와 농촌문제를 고민했다고 한다.

선경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매헌의 꿈, 시에 담다' 전시회, 학문을 권하다.

선경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매헌의 꿈, 시에 담다' 전시회, 학문을 권하다.


'학행(學行)'이란 한시는 윤봉길 의사가 15세 때 열린 시회에서 장원을 한 작품으로 시재가 뛰어났음을 알 수 있는 시(詩)이다. '길이 드리울 그 이름 선비의 기개 맑고 선비의 기개 맑고 맑아 만고에 빛나리. 만고에 빛나는 마음 학문에서 우러나며 그 모두가 학행에 있으니 그 이름 스러짐이 없으리'

'눈뜨다' 코너에서는 19세부터 야학, 독서회, 월진회 등을 주재하며 농민운동에 앞장선 청년 시절을 조명하고 있다. 야학교재로 쓰기 위해 '농민독본'을 저술했고 '부흥원'을 세워 농촌 부흥운동을 주도했지만, 일제의 가혹한 현실의 한계를 절감하고 조국의 독립에 헌신하려는 결의를 품고 망명길에 올랐다.

1930년 3월 6일 23세 청년 윤봉길 의사가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중국으로 떠날 때 남긴 유묵이 있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가니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로서의 비장함과 상하이 의거의 정신이 글씨에도 잘 나타나 있다.

선경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매헌의 꿈, 시에 담다' 전시회, 윤봉길 의사 유묵.

선경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매헌의 꿈, 시에 담다' 전시회, 윤봉길 의사 유묵.


'행하다' 코너에서는 압록강을 건너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찾아가 살신구국의 뜻을 밝혔다. 상하이 의거 이틀 전 의거 장소인 홍커우공원을 현장답사하고 숙소인 동방여관에 머물 때 백범 김구 선생이 찾아왔다. 김구 선생은 최후를 앞둔 윤봉길 의사에게 경력과 감상 등을 써달라고 부탁했고 즉석에서 '자서약력'고 유촉시 4편을 써서 백범에게 건네주었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백범 선생과 식사를 마치고 수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받아 홍커우공원으로 가 일제의 심장에 폭탄을 던졌다. 이후 5월 25일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19일 총살형이 집행돼 25세에 순국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1946년 조국으로 봉환되어 국민장으로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선경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매헌의 꿈, 시에 담다' 전시회,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선경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매헌의 꿈, 시에 담다' 전시회,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2001년 신경림 시인은 '당신이 던진 폭탄은'이란 시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렸다. '당신이 던진 것은 사나운 폭탄만이 아니다/ 꽃이 던져졌고 빛이 던져졌다/ 아픔이 던져졌고 사랑이 던져졌다/ 당신이 던진 꽃과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만을 뜨겁게 만든 것이 아니다/ 원수의 가슴도 뜨겁게 만들고 우리가 누군지 모르던/ 온 세계의 착한 사람들의 그 가슴도 뜨겁게 만들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일제의 침략에 신음하던 우리 국민은 물론 중국인들에게도 희망을 주며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전 세계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렸고 항일독립운동의 새로운 동력과 전기를 마련했다. 중국의 장제스 주석은 '중국의 백만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극찬하며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는 이달 말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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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대한독립,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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