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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카네이션보다 더 아름다운 부모님
5월에 생각하는 수원의 효 이야기
2021-05-07 11:13:14최종 업데이트 : 2021-05-07 11:13:13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최루백 효 이야기는 고려 때부터 널리 알려져, 조선 시대 문헌에도 그 일화가 남겨져 있다. 효행을 기리는 글을 내리고 효자비를 세웠는데, 현재 봉담읍에 있다.

최루백 효 이야기는 고려 때부터 널리 알려져, 조선 시대 문헌에도 그 일화가 남겨져 있다. 효행을 기리는 글을 내리고 효자비를 세웠는데, 현재 봉담읍에 있다


 '어르신 우대 효도업소'가 있다. 지정을 희망하는 업체는 자발적으로 수원시에 신청하면 된다. 어르신 우대 효도업소로 지정되려면 어르신들(65세 이상 혹은 70세 이상 등)에게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 할인율, 할인 항목 등은 업체별로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모집 대상(업종)은 시에 소재한 일반음식점, 목욕장업, 이·미용업, 안경업 등이다. 지정을 받는 업체에는 '효도업소 인증 표지판'을 시에서 부착해준다. 방역용품과 미용용품 등도 지원한다. 홍보도 지원하고, 우수 업체는 표창도 수여한다. 이 사업은 어르신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울러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도 이바지한다. 특히 수원이 효의 도시라는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사업이다. 
최루백 효자각 안내문.

최루백 효자각 안내문


예부터 수원은 감동 어린 효자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시대 최루백이다. 최루백은 수원의 아전 최상저의 아들이다. 최상저는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수원 최 씨의 시조다. 그가 15살 때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최루백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도끼를 들고 나섰다. 호랑이 발자국을 따라가서, 도끼로 호랑이를 잡았다. 호랑이 배를 가르고 그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뼈와 살점을 골라냈다. 그리고 그릇에 넣어 홍법산 서쪽에 묻었다. 그 곁에 움막을 세워 3년간 묘를 지켰다. 

최루백 효 이야기는 고려 때부터 널리 알려져 고려사 열전과 조선 시대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에 그 일화가 남겨져 있다. 조선 시대에 효행을 기리는 글을 내리고 효자비를 세웠다. 현재 봉담읍 분천리 165-1번지에 효자각이 있다.

호매실동에도 효자문이 있었다. 효자 한의리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갑자기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정성껏 치료하였으나 병은 조금도 회복되지 않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인육이 효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에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서 어머니께 봉양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병환은 완쾌됐다. 그러나 건강하게 지내시던 어머니가 다시 병석에 눕고 운명 직전에 이르렀다. 생각 끝에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어머니의 입에 들어가게 했다. 어머니는 조금씩 생기가 나고 기억력을 되찾았으나 사흘을 더 산 뒤 운명했다.

이러한 사실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부모에 대한 효행에 크게 감탄했다. 고종도 효행을 찬양하는 잔치를 열어 주고 효자문을 내렸다. 이 지역 효자문이 도시계획에 편입됐다. 문중에서 1998년 호매실동 효자문을 철거하고, 2000년에 화성군 향남면 독정리에 신축 이전했다.  

당수동에는 김성배 효자비. 그는 허벅다리의 살을 일부 도려 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했다. 효자비는 수인선이 도로가 확장되면서 경기 대명고등학교 건너편에 있었던 것을 교육적인 차원에서 현재 경기 대명고등학교 정문 안쪽으로 이전했다.

당수동에는 김성배 효자비. 그는 허벅다리의 살을 일부 도려 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했다. 효자비는 수인선이 도로가 확장되면서 경기 대명고등학교 건너편에 있었던 것을 교육적인 차원에서 현재 경기 대명고등학교 정문 안쪽으로 이전했다.


당수동에는 김성배 효자비가 있다. 그는 화성군 당수동 지역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어머니 이 씨가 오랫동안 아팠다. 정성껏 병시중하였으나 낫지 않았다. 그때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허벅다리의 살을 도려 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했다. 어머니의 병이 호전됐고, 화성 군민들이 효자로 칭송했다. 화성군에서 1992년 효자비를 세워 그의 효성을 널리 알려 본보기가 되게 했다. 김성배 효자비는 수인선이 도로가 확장되면서 경기 대명고등학교 건너편에 있었던 것을 교육적인 차원에서 현재 경기 대명고등학교 정문 안쪽으로 이전했다.

수원박물관에는 수원시의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된 전주류씨 효자 정문이 있다. 정려문은 충신, 효자, 열녀 등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의 행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마을 입구나 집 대문 앞에 만들어 세우던 붉은 문이다. 전주류씨 효자 정문은 상촌의 전주류씨 종가인 류원상 씨 댁 대문 옆(권선구 금곡동)에 있었다. 2008년 이곳으로 이전하여 원본은 보관 중이고 박물관 야외에 재현품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류태명과 증손자 류의의 효자 정려문을 정려각에 상하로 걸어 놓았다.
 
  수원시의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된 전주류씨 효자 정문. 전주류씨 종가(권선구 금곡동)에 있었던 것을 수원박물관으로 이전. 원본은 보관 중이고 야외에 재현품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수원시의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된 전주류씨 효자 정문. 전주류씨 종가(권선구 금곡동)에 있었던 것을 수원박물관으로 이전. 원본은 보관 중이고 야외에 재현품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부모님 가슴에 온몸으로 붉은 카네이션을 단 이야기다. 시대도 다르고 사회도 다르므로 공감이 안 되는 부분도 있다. 게다가 과거의 효 이야기라 과장된 측면도 있다. 문제는 그 마음에 있는 것이지,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시대가 변했다고,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변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태어나면 제일 먼저 부모를 만나 가족이 된다. 가족은 사랑의 공동체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 효다. 효는 인간의 존중 정신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한다. 효 사상은 사회에서 조화와 사랑, 배려와 존중이라는 이념의 바탕이 된다. 

우리 사회가 과거와 다르게 사건, 사고가 잦다. 정신적으로도 쇠퇴하는 느낌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정에서 효 정신이 흐려지는 것이 원인이 될 수 있다. 효 사상은 인간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길이다. 가정에서 효에 대한 정신을 고양해 정착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조선 시대로 돌아가자는 뜻이 아니다. 효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중시하자는 것이다. 
윤재열님의 네임카드

효. 어버이날, 수원, 최루백, 삼강행실도,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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