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토요수원 인문여행’ 수원의 역사와 미래 편
일제시대 때 지지대고개‧노송지대 없어질 뻔한 이야기 등 생생한 이야기 들을 수 있어
2020-10-13 10:40:28최종 업데이트 : 2020-10-14 13:09:04 작성자 : 시민기자 김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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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수원을 통과하는 경부선 철도 노선은 지지대고개에 터널을 뚫고 노송지대를 가로질러 화성 옆으로 해서 중동사거리를 지나칠 계획이었다고 말하는 김준혁 교수. 사진/수원시청 홈페이지 캡쳐
10일 오전 10시에 열린 토요수원 인문학 강좌 두번째 시간에 강사로 출연한 김준혁 한신대 교수는 "일제시대 수원을 통과하는 경부선 철도 노선은 지지대고개에 터널을 뚫고 노송지대를 가로질러 화성 옆으로 해서 중동사거리를 지나칠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수원 백성들은 서울로 올라가 "정조의 역사와 혼이 담겨있는 지지대고개와 노송들을 훼손해서는 안된다"며 조직적으로 반대시위를 전개했다. 특히 "철도가 화성 옆으로 통과하게 되면 정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화령전에 손상을 준다"면서 격렬하게 반대 했다.
이에 고종황제는 경부선 철도 노선을 변경해서 공사하도록 지시했다. 일본 철도회사는 경부선을 의왕으로 우회하여 외각으로 완전히 빼서 서호저수지 옆으로 해서 수원역으로 빠져 나가게 건설했다.
김 교수는 "19세기와 20세기 초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이런 정조의 개혁정신은 수원 백성들의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수원 백성들에게 있어서 정조의 개혁 정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유지되다가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의 복원으로 이어졌다. 1922년 한반도 전체가 마비될 정도로 엄청난 대홍수가 있었는데 당시 수많은 건물들이 파괴됐다.
사회를 맡은 김지민(왼쪽) 씨와 김준혁 한신대 교수(오른쪽). 사진/수원시청 홈페이지 캡쳐
화홍문은 본래 화성이 축성되기 전 광교천이 흐르고 있어 장마가 질 때마다 물난리를 겪곤 했다. 이에 화성 축성 공사 때에 먼저 물길을 파서 넓히고 7칸의 홍예석교를 하천 위에 걸쳐 놓아 홍수를 대비하게끔 한 수문이다
화홍문 노각이 파괴되자 수원 백성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수원 명소 보존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누각복원 시민운동을 전개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모금운동을 한 결과 1933년 화홍문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김 교수는 "이 엄청난 역사는 세계적인 일이다"면서 "그 당시에 세계 어느 나라가 자연재해로 문화재가 파괴되었다고 국민들이 돈을 모아서 문화재를 복원한 적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만큼 수원 백성들은 정조와 개혁을 늘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외세로부터 침략 받는 것을 극복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김 교수는 "1919년 3월 1일 전국 6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했는데 그중 한 곳이 수원이다"면서 "1일 낮 방화수류정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운동을 한 후 그 날 밤에 모든 백성들이 손에 횃불을 들고 서장대에 올라가 또 다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고 밝혔다.
수원 백성들은 단순하게 만세운동만으로 조선의 독립을 되찾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조선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 활발한 무력투쟁까지 벌였던 곳이 바로 수원이었다.
김 교수는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 아래로 옮기면서 기존의 수원읍을 현재의 팔달산 아래로 이전해서 신도시를 조성한 후 개인돈 6만냥을 내려보내 이곳에서 장사를 원하는 백성에게 무이자로 3년 거치 10년 상환 조건으로 돈을 빌려준 점, 수원 백성을 '깍쟁이'라고 한 유래 등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했다. 홍보물. 사진/수원시청 홈페이지 캡쳐
김 교수는 끝으로 "정조가 사망하지 않고 당초 계획대로 노비제도를 없앴다면 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됐을 것"이라면서 강의를 끝맺었다. 토요수원 인문학 강좌, 경부선 철도, 김준혁 교수, 김숙경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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