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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미복원 시설 현장을 돌아보다
수원화성이 더욱더 완벽한 문화유산으로 남기를
2010-06-21 12:21:05최종 업데이트 : 2010-06-21 12:21:05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수원화성'은 조선후기 정조대에 축성된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 문화유산이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세계인들도 명실 공히 인정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유산 중 하나이다.
정조대왕은 1789년 10월, 비운의 생부였던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현재,삼육보건대학)에서 천하의 길지로 통하던 수원부 읍치가 있던 화산(花山), 현재의 융릉자리로 옮기게 된다. 이후 그 자리에 있던 수원부 읍치는 팔달산아래 현재의 수원으로 옮겨져 신도시로의 면모로 탈바꿈하게 된다.

18세기말 화성건설의 일환으로 세워진 신도시 수원화성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축성방식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좋은 점들만 모아서 설계된 건축물이다. 즉, 실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의 성재(城材)의 장점만을 모아 과학적으로 설계된 시설물이었다. 1794년 성역 계획 당시 10년을 잡았던 화성은 불과 3년도 채 안되어 화성행궁과 더불어 1796년 완성되었다.

조선 최고의 읍성으로서 방어시설을 겸한 총길이 5.7km의 수원화성은 자연과 인공을 적절히 배합하여 건설되었다. 이처럼 화려했던 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의도적인 파괴와 수해로 인한 자연적 소실로 명성만을 이어갈 뿐 이었다. 
이후 1975년부터 복원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화성의 성곽과 행궁 등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거의 본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남수문, 남공심돈, 적대, 은구, 중포사 등이 미복원상태이다.

행궁 유일하게 남아있던 낙남헌
행궁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낙남헌과 노래당

지난 주말 화성연구회 염상균 사무처장님의 안내로 화성행궁과 팔달문 주변 미 복원시설의 위치를 찾아 나섰다. 
우리 일행은 우선 행궁의 정전 봉수당을 지나 일제시대 때에 유일하게 남아있었던 노래당과 낙남헌의 대청마루에서 신풍초교를 바라다보며 행궁의 굴곡진 역사를 공부한 후 답사에 나섰다. 

이미 복원되어있는 행궁 안 미로한정, 내포사를 거쳐 중영의 자리까지 설명을 들으며 팔달문 옆 안내소로 옮겼다. 이 지점이 '은구도(隱溝圖)'에 나오는 상남지(上南池)와 하남지(下南池)였다는 위치 추정과 함께 수원은 원래부터 물이 많이 나는 지역이었기에 화성건설 때에 연못이 여러 군데 조성되었다는 부연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남지가 있던 자리(팔달문 안내소 옆)
남지가 있던 자리(팔달문 안내소 옆)

남수문터
남수문터

이어 우리가 찾아간 곳은 지동시장과 못골시장 사이에 있는 남수문 옛터이다. 
며칠 전 언론에서 남수문 복원발표를 접했었다. 다음 달 시작으로 내년11월 준공식을 가질 예정이란 기사를 떠올리며 현장에 도착하니 가슴이 더욱 뛰었다. 
광교산에서 발원하여 북수문(화홍문)을 거쳐 남수문으로 흐르는 수원천의 유천(流川)을 떠올리며 이어진 성곽따라 봉돈을 거쳐 창룡문으로 걷는 꿈을 잠시 꿔 보았다.

도설화성전도
도설 화성전도

'도설 화성전도'를 보면 신도시 화성의 대략적인 풍경을 유추할 수 있다. 
화성 성곽과 주요 부대시설, 팔달산아래에 위치한 행궁, 민가들, 상가 그리고 조경까지 아주 섬세한 필치로 그려져 있어서 당대를 이해하는데 매우 쉽다.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운 도시 '수원화성'이지만, 지난해에 화성을 수호하는 '성신사'가 복원되어 팔달산의 위용을 더욱더 드높이고 있고, 올해는 남수문까지 복원된다고 하니 화성의 아름다움은 더욱더 완벽해지리라 생각된다.

아직까지 미복원된 화성의 시설물들이 하나 둘 중요도에 따라 중건.복원되어 완벽한 '수원화성'이 후대의 귀중한 유산으로 전승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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