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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핏줄을 잊지 않게 해 주는 시간
2008-05-03 21:46:33최종 업데이트 : 2008-05-03 21:46:33 작성자 : 시민기자   백미영

장손 집안도 아니고 맏며느리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제사를 꼭 챙겨 차려야 하는 제삿상.
지극 정성으로 상다리 휘게 차려 놓은 음식들... 산 자의 음식이 아닌 망자의 음식이라 파, 마늘, 고추양념은 넣지 않기에 맛도 별로 없다.
이것 저것(대추, 밤 등)을 상 밑으로 내려 놓으면 정작 먹을 것은 없다. 어쩌면 이런건 모두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며느리증후군도 제삿날 며칠전부터 서서히 시작된다.   

우리집 제삿날 밤은 까만 밤이 아니고 하얀 밤이다. 

현관을 가득 메운 신발들. 항공모함 같은 구두, 굽 높은 하이힐, 한 짝씩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 신발이며, 하루종일 준비해 온 음식들이 온갖 냄새를 풍기며 집안 구석구석을 들썩거리게 한다. 

주방에선 동서들의 아이들 교육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경제며 정치 이야기로 떠들썩한 남정네들, 오랜만에 사촌들 만나 재잘재잘대는 아이들의 소리, 아파트의 불빛은 하나하나 꺼져 가는데 우리집 제삿날의 밤은 깊어 갈 줄 모른다. 

내 핏줄을 잊지 않게 해 주는 시간_1
내 핏줄을 잊지 않게 해 주는 시간_1

제사 음식을 차리는 주부들의 손길은 깔끔하고 정갈하고, 제사 올리기전에는 맛볼 수 없어 동글동글 납작하게 지져낸 동그랑땡전이나 껍질을 곱게 친 밤, 대추 등을 예쁘게 올려 쌓아 혹 잘못 쌓아 떨어질 때면 아이들은 낼름 주워 입속으로 쏘옥 들어가도 누구하나 나무라지도 않는다.
조기, 과일, 새로 갓 지은 흰 쌀밥, 소고기무국이 준비되면 모두들 말끔한 모습으로 제삿상 앞에 선다. 

'유세차 모년 모월 어디 모씨,,,,' 라는 축문이 읊어지면 모두들 제사상 앞에 무릎꿇고 절을 올린다. 

쪼르륵 쪼르륵 쪼르륵 세 번 소리를 내며 따르는 술 소리, 자기 몸을 태워가며 향내를 풍기는 향불, 잠시 제사상에서 물러나 조상님들이 음식을 드실수 있도록 기다려 준다. 

제사가 끝나고 맛있게 보이는 음식들을 먹을 시간은 새벽 2시쯤. 

몇 년전만 해도 이렇게 지냈는데, 요즘은 간소화 시켜 음식도 어느 정도는 산 사람들의 입에 맞게 준비하고, 제사도 10시쯤이면 다 끝낸다.
오순도순 친척들과 둘러앉아 진솔한 이야기와 덕담도 나누며 내 핏줄을 잊지 않는 시간을 만들고,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옛추억을 되살려 길이길이 기억되는 우리집 제삿날. 

오늘 밤은 유난히도 별이 총총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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