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동대문운동장의 추억
<칼럼>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화려함보다 늘 보아오던 익숙함, 그 따뜻함에 있다
2007-12-06 10:16:47최종 업데이트 : 2007-12-06 10:16:47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동대문운동장이 헐리고 그 자리에 디자인센터를 짓는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을 추진한다는 보도다. 
서울시는 이 지역에 패션 산업단지와 관광단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도시 건설에 적극적이다. 변화하는 동대문의 정체성을 적극 수용하겠다는 의지다. 이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까지 공표된 상태다.

동대문운동장은 동대문옆 성터에 1926년에 건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체육시설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여기에서 축구를 하고 응원을 하면서 민족의 울분을 달랬다. 잠실운동장이 건설되기 전까지 이곳은 각종 국제대회까지 치렀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이런 곳이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다. 나이도 나이지만, 주변 지역이 패션 산업단지로 변하면서 스포츠 시설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청계천 복원 공사 때 주변 상인들이 격렬히 반대를 했듯이 이번에도 반대의 진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다. 우선 생계를 걱정해 주변 상인들이 생존권을 빼앗길 수 없다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체육계는 운동장은 이제는 아름다운 건축물이고 그 자체가 기념관이라는 입장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문화계의 저항도 거세다. 

없어진다는 것은 슬픈 마음을 만들어낸다.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며 자신과 싸웠던 운동선수들은 잊지 못할 추억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운동장에서 좋아하는 선수와 팀을 응원했던 기억이 있다. 프로야구 출범 전에 고향을 떠나 살던 서울 사람들은 이곳이 고향이었다. 
고교 야구 경기가 있을 때 고향 팀을 응원하던 기억은 뜨겁다 못해 감동적이었다. 나란 위인도 운동장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추억이 있어 아쉬움이 더한다.

나는 소위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전에는 고등학교도 시험을 봤는데, 우리가 입학하기 두 해전부터 없어졌다. 그리고 거주지를 중심으로 추첨 방식에 의해 학교를 배정했다.

내가 간 학교는 관악고등학교였다. 당시 3년 전에 개교한 공립 학교였다. 서울지역의 공립학교라면 경기, 경복, 서울, 용산 등 소위 명문 고등학교만 있었다. 그런데 신설 공립학교가 몇 개 생겼다. 그것이 여의도고, 영등포고, 우리 학교였다.

공립학교 선생님들은 순환 근무를 하게 되니 모두 그 쟁쟁한 학교에서 근무를 하시다가 오신 분들이었다. 자연히 뺑뺑이 세대를 처음 만나니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 
우리는 매일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일류 고등학교 선배들과 비교당하고 공부도 못하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런데 서울지역 9대 공립체육대회라는 것이 있었다. 
동대문운동장에 모여 학교 간 경기를 했다. 경기여고, 수도여고 등 여학교도 참가했던 기억이 난다. 그 체육대회 때 학교끼리 응원전도 볼만 했다. 
우리는 응원 준비 때문에 수업을 자주 안 했다. 무서운 교련 수업 시간이 없어질 때는 주먹을 치켜 붙이며 환호성을 질렀다. 

동대문운동장에 간 날은 더 좋았다. 
생전 처음 보는 타탄트랙시설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수업을 안 하고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소리를 지르다보면 하늘이 맑았다. 
더욱 신이 난 것은 매일 말로만 듣던 경기고 '놈'들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경복고도 그랬고, 용산고도 그랬고, 우리와 개교 나이가 비슷한 여의도고 '놈'들도 모두 비실비실했다. 우리 애들이 이상하게도 달리기도 잘했고, 힘도 셌다. 

동대문운동장을 나설 때는 우리는 이미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였다. 
경기가 끝난 후 운동장을 나와서도 몇몇은 동그랗게 모여서 '쿠콰이고 쿠콰이고 ~(관악고 구호)' 등 뜻도 모르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다가 교가를 부를 때는 뒤집어썼던 모자를 바로 쓰고 근엄한 자세로 끝을 맺었다.

동대문운동장에 다시 찾은 것이 대학 때다. 
모교 야구부 경기가 있으면 캠퍼스 전체가 들썩거렸다. 우리 학과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수님께 부탁을 드려 아예 휴강을 하고 야구장으로 갔다. 
고등학교 때는 질서정연하게 응원을 했지만, 대학 때는 달랐다. 
매스게임도 없었다. 그러나 응원단 규모가 달랐다. 멋있게 제복을 차려입은 응원단에 밴드 시설도 야구장을 떠나게 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이 응원을 주도할 때는 함성이 더 커졌다. 캠퍼스에서는 못 만나던 선배도 야구장에서는 만날 수 있었다. 모두가 하나 되는 기분이었다.

우리 학교가 지면 지는 대로 이기면 이기는 대로 동대문 근처 술집은 만원이었다. 
어떤 날은 주머니에 있는 동전까지 털어먹고 차비도 없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때 지하철을 몰래 타고 역 울타리로 내릴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군복무 중 휴가를 나왔을 때도 우리 학교 게임이 있으면 여기저기 연락을 해서 운동장에서 소리를 질렀다.

돌이켜보니 그때가 가장 생기발랄하고 제일 순진하고 행복한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내가 다니는 모교에 대한 열정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었다. 
캠퍼스의 학과 지식보다 더 큰 용기와 자부심을 가르쳐준 운동장이었다. 젊음을 발산하는 열린 운동장에서 삶의 에너지를 찾았다.

그곳이 우리의 낭만이었다. 
요즘 대학생은 폐쇄된 클럽에서 논다고 하는데, 우리는 열린 운동장에서 놀았다. 운동장에서 논 것이 아니라 그곳에 뛰어들었다. 분주한 삶의 연출을 관전했다. 
격투하는 플레이어들과 한 팀이 되어, 의식이 아닌 몸으로 체험했다. 내가 그 속으로 뛰어들어 함성을 지르며 응원을 했다. 그러면서 노래와 춤을 즐기고 술도 마셨다. 
친구들과 혹은 좋아하는 여자하고도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했다. 어른들은 휴강을 하면서까지 응원하는 우리를 마뜩찮게 보았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낭만을 즐기고 삶의 에너지를 찾았다.

그런 운동장이었는데, 개발의 논리에 밀려난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폭력적 개발의 권력에 맞서는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나란 위인은 그런 의지도 없다. 단지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기억의 등가물이 망실된다는 데는 안타까움이 인다. 

물론 운동장이 나에게 젊음의 에너지를 주었던 것처럼, 새로 단장되는 운동장 공원은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공간이 된다.

새로움이 꼭 아름다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낡은 것에도 향수를 느낄 수 있고 추억을 만질 수 있다. 
새것이 도시 미화의 정답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낡은 시설을 허문다고 우리 삶이 화려하게 재생산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횡포다. 오히려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어가는 시대에는 거꾸로 가는 시간 여행에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있다.

오래된 시설에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남아 있다. 
그 추억은 시간이 갈수록 아름답게 아주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새로 만드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오래된 시설물은 다시 만들 수 없다. 새로 만드는 오만함보다 변하지 않는 평온함도 우리가 기대고 싶은 풍경이다.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화려함보다 늘 보아오던 익숙함, 그 따뜻함에 있다.

윤재열님의 네임카드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