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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을 기억하다
슬픈 기억이 없었다면 즐거운 기억은 존재할 수 없다
2010-05-18 17:43:53최종 업데이트 : 2010-05-18 17:43:53 작성자 : 시민기자   임화영

지난 밤 부터 시작된 소나기가 점심이 지나서도 줄기차게 쏟아진다. 
여기저기 고개를 내민 여린 잎사귀들이 시원한 빗물을 머금고 푸르고 생기 있게 자라난다. 마치 삼십 년 전의 아픈 기억을 추억하듯 눈물 같은 빗줄기가 피 묻은 대지를 씻어내린다. 군사정권의 폭력에 항거하며 스러져간 광주시민들의 눈물이 절대 자신들을 잊지 말라는 기억의 물줄기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닐까? 

망각을 기억하다_3
망각을 기억하다_3

우리는 기억 속에서 신화처럼, 전설처럼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 기억이 아픔이고 슬픔이고 고통일지언정, 그 기억을 자양분으로 성장한 인생의 나무가 푸르름과 결실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는 작은 진리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 나무의 품안에 모여든 작은 동물들과 둥지를 튼 새들과 뜨거운 여름 한 낮의 태양을 피해 모여든 길손들의 쉼을 가능케 하는 아름다운 희생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소년이 인생의 노년에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주기만 하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나무의 고마움을 기억하듯 구슬프지만 시원스럽게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나라를 위해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 여인이 삶을 마감하고 저승세계로 가기위해 저승으로 가는 강가에 도착한다. 저승사자가 여인에게 묻는다.
"이제 이 강을 건너면 당신은 이승세계와 영원히 작별을 하게 됩니다. 이 강을 건너기 전에 이승의 기억들을 말끔히 잊게 만드는 망각의 샘물을 마실 수 있는 선택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여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 망각의 샘물을 마시고 싶군요. 이승에서의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더 이상 가져가고 싶지가 않아요?"

망각을 기억하다_1
망각을 기억하다_1

그러자 저승사자가 다시 묻는다. 
"하지만 당신의 아프고 슬픈 기억뿐만 아니라 기쁘고 즐거웠던 기억들도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요, 그래도 그 망각의 샘물을 마시겠소? "

여인은 고통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잇는다.
"사실 나에게는 기쁜 기억보다는 슬프고 아픈 기억이 더 많아서 잊는다 해도 손해가 될 것 같지는 않군요. 오히려 살아가는 동안 나를 구속하던 실패의 기억들이 사라져준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저승사자는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이 망각의 샘물을 마신다면 당신은 사랑이라는 고귀한 진리도 잊어버리게 될 것이요? 그래도 이 샘물을 마시겠소?" 

여인은 한참을 생각 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나에게 유일하게 즐거운 추억은 사랑했던 기억들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었다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을 거예요... 이제야 깨달았어요. 슬프고 아픈 기억이 없었다면 기쁘고 즐거운 기억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그리고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진리를 잊고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나는 이 망각의 샘물을 마시지 않겠어요..."
여인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저승사자와 함께 저승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태초에 창조주가 천지를 창조할 때 생물과 모든 것들을 짝을 지어 만드셨다. 남자와 여자, 수컷과 암컷, 볼트와 너트, 열쇠와 자물쇠, 희망과 불행,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그리고 기억과 망각, 이처럼 짝을 지어 만들어 놓은 까닭은 혼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둘이 함께 할 때 진정한 존재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어 하지만 망각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이 있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다.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황에 따라 깊이가 달라지는 말이다. 기억과 망각은 상호 보완적인 존재이다. 

메모리에 데이터가 저장될 때 무한정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정보를 지우고 그 빈 공간에 새로운 정보를 저장하게 된다. 
컴퓨터에게는 기억은 있지만 망각은 없다. 저장되지 않은 정보는 모두 삭제되어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필요한 정보들을 마우스로 끌어 휴지통으로 넣어버린다. 
하지만 사람은 조금 다르다. 오래된 기억이 먼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마음대로 지워 버릴 수도 없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뇌 속의 해마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 충격의 각인력에 따라 최근 것이 먼저 사라질 수도 있고 오래 전 기억이 최근의 기억처럼 생생할 수 도 있다. 기억을 인간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지만 훈련을 통해 망각의 시기를 늦추거나 기억의 시간을 길게 할 수는 있다.

망각을 기억하다_2
망각을 기억하다_2

우리에게는 기쁜 일만 기억하고 슬프고 괴로운 일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다. 
온실 속의 화초를 자연 환경에 노출시켰을 때 이겨내며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적다. 외부의 자극과 고통의 정도에 따라 단련되고 극복할 수 있는 자생력의 크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요사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노인들의 알츠하이머병, 일명 치매는 기억과 망각이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절실한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 
무조건 잊는 것이 능사가 아니며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해답이 될 수도 없다.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자극들에 대해 적절한 반응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기억과 망각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의 여러 가지 기억들이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해지지만 내가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면 좀 더 아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의 강을 건너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기억들을 잊지 않겠노라고 말하며 망각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아름다운 마지막이 되길 희망한다.

자유기고가 임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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