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발자취 따라 수원에서 강진까지
'길 위의 인문학' 강진탐방기
2010-05-10 09:06:56최종 업데이트 : 2010-05-10 09:06:56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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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前) 문화재청 청장이셨던 유홍준 선생님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강진과 해남을 남도답사 일번지라 칭했다. 우리나라 국토 최남단에 위치한 이곳을 으뜸으로 꼽았을 만큼 정말 아름다운지 적잖이 궁금했었다. 사의재 우두봉에서 본 강진만 이곳에서 유일하게 동문 밖 우물곁에 있던 주막의 노파만이 다산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이곳이 첫 거처지 '동천여사'이다. 마땅히 지켜야 할 네 가지 '담백한 생각' '장중한 외모' '과묵한 말' '무거운 몸가짐'을 의미하는 뜻에서 사의재(四宜齋)'란 당호를 지었다. 여기서 다산의 사고방식이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당시에 처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갈고 닦은 끝에 오늘날 방대한 500여권의 저서를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지낸 고성사 보은산방과 우두봉을 찾아 나섰다. '고성사(高聲寺) 보은산방'은 을축년(1805) 겨울에 1년간 아들 학연과 주역을 공부하며 지내던 곳이다. 당시 고성암은 움막 수준의 요사채 정도였을 것이라 한다. 후대에 지어진 현재의 가람규모는 그에 비해 꽤나 커보였다. 소의 워낭소리가 들리는듯하여 붙여졌다는 고성사 왼편으로 약 40여분 오르니 우이산(牛耳山) 정상이다. 보은산 일명, 우이산 이라고도 불리는 우도봉 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고 힘이 꽤나 들었다. 그렇지만 오르는 길목마다 제철을 만난 저마다 이름 모를 꽃들이 아기자기 오밀조밀 방긋방긋 반겨주어 흐르는 땀을 식혀주었다. 또한 정상(439m)에서 바라본 강진의 진면목과 저 멀리 펼쳐진 강진만의 도도한 풍광은 이내 힘들었음을 지워버리고도 남았다. 이곳에서 흑산도를 굽어보며 유배된 둘째형 정약전을 그리워했다고 하니, 나정에서 헤어진 후 애절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를 그려보니 마음이 아파왔다. 하루 일정 끝에 강진도서관에서 '정민'선생님의 특강이 이어졌다. 다산의 공부법과 그의 제자들과 얽힌 이야기들을 거의 문집에는 빠져있는 친필 자료들을 스크린을 통해 일일이 재미있게 해석해 주셨다. 그렇지만, 말미에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던 다산과 제자 황상간의 '절창'에 가까운 일화를 듣는 순간, 옆 사람의 눈치를 살피기도 전에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제자를 아끼며 사랑했던 다산의 인간미가 구구절절 편지 속에 녹아있었다. 10년의 세월을 보낸 다산초당에 서니 다산 선생은 병인년(1806) 가을 이학래의 집에서 2년을 보낸 후, 무진년(1808) 봄 강진 마지막 네 번째 거처지 다산초당으로 옮긴다. 이곳에서 10년을 보내며 후학들을 가르치고 '목민심서'등 방대한 저서들을 집필했다. 둘째 날 다산유물관을 들러보고 바로 다산초당으로 올라갔다. 오르는 길이 모두 제각각 자연을 뽐내듯이 거칠게 대나무 뿌리가 가로막기도 했지만, 가는 도중 여기저기 둘러보며 디카에 차곡차곡 담았다. 다산초당에 있는 천일각의 풍광 다산초당 드디어 도착해 만난 다산 초당. 너무 꿈꾼 탓이었을까? 비탈을 평평하게 만들고 층마다 채소들을 심으며 초당의 풍경을 가꾸었다던 흔적과 주위의 경관은 인공미만 느껴졌다. 초당이 아닌 기와집은 후대의 작품으로 초당 왼편 석가산 연못과 함께 사랑채였던 동암이 자리해 있다. 유배가 해금되던 해 정다산의 돌이라는 '정석(丁石)의 바위 앞에 오롯이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오히려 동암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들어가 비탈진 곳에 위치한 천일각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곳 천일각에 올라 강진만을 바라다보며 다산선생님은 아마도, 고향 마재를 떠올리며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바라다보았을 것이다. 이후 나머지 답사지 5곳을 바삐 움직이며 모두 소화한 후, 오후 3시쯤 서울로 향했다. 서울서 강진까지 버스로 4시간 30분이 걸릴 만큼 먼 강진 땅. 당시에 걸어서 꼬박 16박 17일이 걸린다는 땅 끝 마을 오지였을 강진에서 어떻게 다산선생님은 18년이란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셨을까? 첫날 부푼 가슴을 안고 첫 대면한 강진 땅은 사실 실망스러울 만큼 매력적이지 못했다. 동네가 예쁘게 보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산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인상은 둘째 날 오후가 지나면서 바뀌었다. 이내 떠나기가 싫어지더니 정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절창을 남긴 김영랑 생가를 돌아 나오면서 둘레에 지천으로 개화한 모란의 붉디붉은 꽃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래서 '남도 일번지'라 했을까, 다산의 고뇌와 숨결을 그 어느 곳 보다도 고이 간직하고 있는 강진 땅을 떠나보내며 다산과 제자 황상간의 눈물겨운 편지 내용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이래서 이번 프로그램을 '길 위의 인문학'이라 명명했나 보다. 길 위의 인문학 , 강진, 김해자, 답사, 유홍준, 다산 정약용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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