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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비 이방자 여사
영친왕과 이방자여사는 역사의 슬픈 희생양
2010-03-15 18:53:42최종 업데이트 : 2010-03-15 18:53:42 작성자 : 시민기자   한인수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_1
영친왕비 이방자여사의 생전 모습
요즘 언론에서 자주 거론되는 역사적 인물이 있다. 바로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다. 

지난 2월 18일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의 유물을 언론에 공개했다. 전시가 아닌 공개여서 언론에만 잠깐 노출이 된 셈이다. 이날 공개된 유물은 영친왕비의 일기, 편지, 글 등이다. 

그렇다면 영친왕비가 과연 누구인지 재조명해 볼 필요성이 있다. 구한말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아간 뒤 일제는 조선왕가의 재건을 막기 위해 온갖 술수를 쓰다가 그 중의 하나로 조선의 왕족과 일본의 왕족을 결혼시키는 전략을 편다. 

이 전략의 희생양이 된 사람이 조선의 영친왕과 일본의 나시모토 마사꼬(이방자)다. 
마사꼬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일본측 의사들의 진단에 따라 일본은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 위해 강제적인 결혼식을 치른다. 조선에서 큰 반대를 했지만 권력은 이미 일본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반대를 해도 그 힘을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1919년 영친왕과 이방자여사는 일본에서 결혼을 하게 된다. 
자녀를 낳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을 받았던 이방자여사는 놀랍게도 이진이라는 아들을 낳게 된다. 그 사실은 일본에도, 조선에도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진은 태어난 지 1년이 되기도 전에 죽게 되는데 이진이 죽은 원인에 대한 여러 설들이 난무한다. 

일본측의 독살설, 조선측의 독살설, 건강이상설 등 다양한 설들이 있지만 밝혀진 것은 없다. 
자식의 죽음을 목격해야만 한 이방자여사는 큰 슬픔에 잠기게 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우리나라는 큰 기쁨에 쌓이게 되지만 그 당시 일본에서 기거하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왕족이라는 신분을 잃어버리는 아픔에 처한다. 
한국으로 환국하려고 해도 왕족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염려로 귀국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한국으로 귀국을 하고 국적을 회복한다. 
그 후 1970년이 되어 영친왕은 지병으로 숨지게 되고 홀로 남은 이방자 여사는 장애인복지에 큰 공헌을 하다가 1989년 낙선재에서 숨지게 된다. 
항간에 이방자여사의 국적에 대한 비난의 글이 많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영친왕과 이방자여사는 역사속의 슬픈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강제적인 힘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던 인물들이다. 
왕족이라는 신분이 항상 행복해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본다. 
그리고 영친왕과 이방자여사는 국적이 불분명한,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음에도 한국인임을 고집하고 한국으로 귀국한 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들을 위해 수없이 많은 수고와 노력을 했음은 분명하다. 

슬픔과 고통의 나날을 꿋꿋하게 버텨내고 사회복지의 큰 획을 그은 두 분에게 감히 경의를 표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이방자 여사, 유물공개, 한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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