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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역사
2010-03-06 10:23:40최종 업데이트 : 2010-03-06 10:23:40 작성자 : 시민기자   임동현

아직도 바람이 스산한 2월의 마지막 날, 집사람과 함께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청태종공덕비, 즉 삼전도비를 다녀왔다.

1637년 1월30일
지금으로부터 약 370년전 차디찬 겨울 칼바람을 헤치며 남한산성을 나섰을 인조을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일국의 왕으로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하기를 47일.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강화도에 피신시킨 가족들이 잡혀왔다는 소식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남한산성 서문을 나서게 된 인조.

삼전도비,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역사_1
삼전도비,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역사_1

당시의 상황을 승정원일기(인조 15년 1월30일)와 인조실록(인조15년 경오)의 기록을 간추려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인조는 5백명의 신하를 거느리려고 했으나 50명밖에 허락 되지 않았다. 서문안에 도열한 백관은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하니 백일(白日)도 빛을 잃었다. 임금이 산에서 내려와 나뭇가지를 땅에깔고 앉았더니 조금후에 무장한 청병사 수백명이 오고 뒤따라 병자호란의 주전장수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와서 임금을 인도했다. 임금이 그 뒤를 따라 광주읍(廣州邑)에 다다르니 용골대가 영을 내려 신하들은 뒤에 떨어지게 하였다.

이에 임금은 각 부서에 중요대신 1명씩만 인솔하여 전진하여 비석앞에 이르러 바라보니 황제(皇帝,청태종)가 삼전도에 단을 베풀고 그 위에 장막을 치고 좌정했으며 무장한 군사들이 진을 치고 풍악을 울렸다. 임금이 말에서 내려 비석아래에 앉았고 곧 용골대등의 인도를 받아 도보로 진문밖에 당도하였다.

용골대등이 임금을 동작문밖에 앉게 하거늘 임금이 세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번 조아리니(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용골대등이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서 전하기를 "전일의 일은 장황하고 용단을 내려 나왔으니 다행한 일이오." 하거늘 임금이 대답하기를 "천은이 망극하나이다"라고 했다.

다시 용골대등의 인도로 임금이 동작문으로 들어가 단아래에 북향하여 자리자고 청국인(단을 지키던 사람)이 이를 크게 알리니, 임금이 다시 삼배구고두하였다. 

삼전도비,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역사_2
삼전도비,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역사_2

지금으로부터 대략 370여년전의 싸늘한 겨울의 한 날. 

허락된 50명의 신하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나와야 했던 인조의 당시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나라를 전란으로 유린시키고도 지켜내지 못한 일국의 왕으로서의 자존심은 차가운 땅바닥에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찧으며 항복을 요청하는 굴욕스러운 모습으로 최고로 부서지고야 만다.

당시의 생생한 기록인 승정원 일기를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자.
'청태종이 갑자기 일어나 단하에 내려와 소변을 보았고 인조도 단하에 내려와 진문밖 동쪽에서 휴(休)게 했다.'

삼전도비,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역사_3
삼전도비,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역사_3

그러한 치욕의 순간 이후, 청태종의 요청에 의하여 항복의 행위가 이루어진 바로 그 자리에 청태종의 공적을 기리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즉 삼전도비가 세워지게 된다. 정면에는 여진문자와 몽고문자로 후면에는 한자로 세겨진 높이 5.7미터의 거대한 비석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비석은 태생의 원죄(原罪)로 인하여 여러번 부침을 겪게 된다.

청의 세력이 완연히 약화된 고종임금 시절, 어명에 의하여 쓰러졌다 일제시대 다시 일으켜 세워지고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시절 지하로 매몰되었다가 한강변 홍수로 인하여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 제5공화국 전두환시절, 치욕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자 바로 지금의 자리인 석촌동 한 귀퉁이에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삼전도비,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역사_4
삼전도비,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역사_4

현재는 동네아이들이 야구놀이를 하거나 주민들이 산책을 하는 공터 정도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 비석이 말해주는 바는 분명 그 이상일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안타까운 우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거대한 이 비석 앞에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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