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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이 아직 좋은 이유
함께 놀던 친구들이 그립다.
2010-01-25 11:24:56최종 업데이트 : 2010-01-25 11:24:56 작성자 : 시민기자   심춘자

흔히 계단이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 촬영지였던 스페인 광장이다. 계단에서 오드리햅번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그레고리팩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그 스페인 계단 말이다. 

그러나 나에겐 추억이 담겨져 있는 특별한 계단이 있다. 유년기를 보낸 강원도는 지리적으로 넓은 평야지대 보다 경사진 비탈이 많아 마을과 마을을 경계로 나누워 지는 곳은 항상 크고 작은 고개를 넘어야 했다. 
마을 입구에는 마을의 무사안전을 위한 재실이 있고 옆에는 마을이 처음 열리던 그 시절부터 내내 서 있던 나이 많은 고목도 지키고 서 있었다. 그 재실을 지나갈 때마다 귀신 나온다는 어른들의 얘기에 발걸음이 빨라지고 친구들과 꼭 함께 지나가던 그곳에 계단이 생겼다. 

아랫동네에서 우리 동네에 오려면 작은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경사진 흙길이었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는 때에는 빗물에 흙이 쓸려서 경사진 바닥이 울퉁불퉁 골이 파이고 비가 그친 뒤에는 골아빠진 뼈다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눈이 별스럽게 많았던 겨울에는 눈이 녹기 시작하는 봄까지 겨우 내내 빙판이 되어서 먼 길로 돌아다니는 수고를 해야 했다. 가끔 그곳에서 비료포대에 보릿짚을 넣어서 썰매도 탔지만 어른들의 눈에 띄면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몰래몰래 탔었다. 

국민학교를 입학하지 않았던 때였다. 어떻게 해서 계단을 만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한창 새마을 운동이 활발하여 좁은 길은 넓혀서 신작로를 만들고 흙길은 시멘트로 도로를 포장했었다. 취로사업이라 했던가? 일정기간 일하고 나면 밀가루를 받아 온 것도 같다. 

마을 사람들이 곡괭이와 삽으로 파고 다듬어서 시멘트로 덮는 모습을 구경하러 다니기고 하고 옆에 있다 보면 카스테라 빵을 먹을 수 있는 횡재를 하는 날도 있었다. 그 후로도 가끔 친구들과 작업장에서 기웃거린 것은 빵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민학교를 가려면 아랫동네를 경유해서 다녀야 했는데 말끔하게 시멘트로 단장한 계단을 통과해서 다니는 것이 아랫동네 아이들에게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학교를 파하고 아랫동네아이들까지 계단에 올라와 놀았다. 평평하고 말끔한 바닥은 충분히 계단을 책상 삼아 엎드려서 숙제를 할 수 있었고 작은 곱돌을 주어 계단을 도화지 삼아 낙서도하고 그림도 그렸다. 
방바닥처럼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 보면 어느새 옷의 앞섶은 흙먼지로 뿌옇게 되고 무릎이 구멍 나는 일도 다반사였지만 누구하나 신경 쓰는 사람들이 없었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비석치기며 땅따먹기까지 무수한 놀이를 새로 난 계단 길 위에서 행해졌었다. 

일요일 아침에는 애향단별 마을 청소가 있는 날이었는데 그날은 일주일 동안 계단에 낙서한 것을 지우는 일은 저학년인 우리들이 맡아했다.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와 짚으로 닦아야 했는데 크레파스로 낙서한 것은 잘 지워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친정 마을엘 가면 그 계단은 세상의 변화 따위에 신경도 쓰지 않고 말없이 오가는 행인들에게 이야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자동차로 충분히 다닐 수 있는 큰길이 나서 그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이라 해봤자 팔팔한 청년의 기운으로 처음 그 계단을 공사하던, 지금은 고향을 지키는 촌로들의 왕래뿐이다. 

가끔 아이들과 친정에 가면 마을을 산책하면서 계단에서 뛰어 놀던 이야기를 해준다. 봄이 되면 계단에 책가방을 놓고 옆 산에 들어가 진달래를 한 아름 꺾어와 계단에 앉아 따먹기도 하고 가위 바위 보를 하면서 계단 먼저 올라가기 게임도 했던 기억을 떠올려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지금은 대부분의 건물에 엘리베이터 시설이 되어있지만 나는 계단을 좋아한다. 
그런데 지금 계단을 좋아하지만 어느 날 앞을 가로 막고 서 있는 수 없이 많은 계단을 보고 " 도대체 이게 뭐야?"하고  삐걱거리는 무릎을 갖고 한숨을 쉬는 날이 오면 진달래 따먹고 엉금거리면서 그림 그리던 시절을 회상하며 마지막 힘을 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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