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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사랑에 빠지다
박완서님의 글을 읽다보면
2010-01-19 16:50:21최종 업데이트 : 2010-01-19 16:50:21 작성자 : 시민기자   심춘자

날씨가 많이 포근해졌다. 질척거리기는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바람과 빛은 온순한 양과 같이 보드랍고 순했다. 눈이 묻은 부츠는 버스 실내에 또렷한 발자국을 남기면서 다른 사람들의 바자국과 어우러져 바닥에는 물기가 흥건하게 되었다. 

밍크코트를 입어 한눈에도 좋은 옷으로 차려 입은 듯한 아줌마라고 부르기도 어중되고  할머니라고 하기엔 더 애매한 여자 분이 한껏 외모를 뽐 낸 듯 구둣소리를 내며 버스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민첩하지 못한 행동이 운전기사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5000원짜리 지폐를 넣고 거스름돈을 기다리는 여자에게 운전기사는 잔돈을 내지 않은 것을 타박하고 다른 사람들이 탈 때 요금을 받아서 돌려주었다. 그동안 그 여자는 손잡이 기둥을 잡고 버스가 급정거와 급출발을 할 때마다 위태롭게 서 있었다. 
왠지 버스 이용하는 모습이 어설픈 것이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중년의 나이임에도 얼굴이 발그스레 민망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내가 내리는 팔달문에서 우연하게 함께 내렸다. 행선지는 달랐지만 자꾸 시선이 가 돌아보았을 때 그 여자는 검은 중형차에 오르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박완서의 '그래도 해피엔드'에서 한껏 뽐내고 동창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서울행 버스를 탔던 그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환갑진갑 다 지났지만 평소엔 50대로 보아 주었고  그날처럼 연지곤지 찍고 입술도 발그스레 바르고 나면 40대까지 봐준다고 굳게 믿었던 그녀의 모습이다. 
인텔리 계급까지야 아니더라도 교양이 넘쳐나는 그녀는 평생을 서울에서 보내다가 나이 들어 30분 거리도 되지 않는 서울근교에서 야채나 꽃을 키우면서 살겠다는 전원생활이 꿈이었던 남편을 따라 걱정 없이 사는 복 많은 여자였다. 
30년  넘게 전철을 이용한 서울의 토박이는 오랜만에 타는 버스는 앞문으로 타는지 뒷문으로 내리는지 모를 정도로 어설퍼서 운전기사에게 타박을 받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 내가 타박을 받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친구와 만나서 아이들 옷도 사고 시장 골목골목을 누비고 돌아다녔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알록달록 예쁜 아이들의 옷도 많았고 벌써 겨울상품은 세일을 하고 있어 정가 보다 많이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었지. 오래 된 간판의 분식집에 들어서자 새빨간 입술과 초록색의 아이세도우를 한 아주머니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단무지와 물을 갖다 주곤 처음부터 반말이다. 우리는 쫄면과 김밥을 시키고 쇼핑 품목에 대하여 흡족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한 블록만 더 가면 더 싸게 살 수 있는데 뭣 하러 그런 곳에서 샀냐?"고 참견했다. 반가워하지도 않았는데 손님이 없어서 그랬을까 쉬지 않고 "네네네"하는 것이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이다. 

"그래 맞아." 
'그리움을 위하여'에서 사촌 동생으로 등장했던 그 여자. 

그랬다. 시도 때도 없이 생각이 났다. 현실의 세상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장에 나갔다가 우연하게 만나게 되는 이웃일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살아가면서 답답할 때 현명하게 대처하는 롤모델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박완서님의 글에서 나는 그리운 것임에도 잊고 사는 것들에 대해서 상기했다. 어머니, 어깨동무, 울타리 너머의 자리를 깔아 논 풍경, 처음으로 마음을 열어 준 남자까지도 아득한 기억속의 이름들을 불러내곤 했다. 앞으로 남은 나의 미래를 예견 하거나 질시 담긴 눈으로 부러움을 갖는 대상이기도 했다. 살아가는 세대가 같지 않았지만 비슷한 정서가 그의 책에 더 끌리게 하는 것 같았다. 

도서관의 수많은 책들 중에 우연하게 그녀의 이름과 맞닥뜨릴 때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십 수 년 알고 지내던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눈물 나게 반가웠다. 처음 '나목'으로 만나면서 그 후로도 셀 수 없는 작품으로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정서가 비슷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얘기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러나 가끔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한 낮을 함께 하고도 후회가 되는 사람이 있고 함께한 시간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 하지만 요즘 느낀다. 한권의 책이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하는 것보다 훨씬 마음을 알차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박완서, 친절한 복희씨, 심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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