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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가 바라보는 죽음이란
떠나간 친구를 생각하며
2010-01-11 00:10:13최종 업데이트 : 2010-01-11 00:10:13 작성자 : 시민기자   유진하

새해를 맞이하여 몸도 깨끗이 하고 피로도 풀 겸 찜질방을 갔다. 사실 목욕탕을 가면 따뜻한 물에 들어가서 별의 별 생각을 한 경험들이 다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여느 때처럼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가, 정말 우연히 고등학교 때의 친구가 생각났다. 그 친구는 교통사고로 인해서 지금은 내 곁에 없는 친구다. 꽤 친한 친구였던 터라 어떠한 과정으로 사고가 났는지 상세하게 알 수 있었고, 그래서 그 때 느꼈던 충격적인 감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친구를 다시 떠올리며 죽음에 관해 생각해봤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문득 침대에 누워서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단순한 질문과 단순한 답을 반복하며 결국에는 '에라 모르겠다.'라고 넘겨버리곤 했었다. 지금도 확실한 답을 내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이다. 머리가 희끗한 철학자들도 죽음을 정의내리기 힘든 마당에, 한 대학생이 죽음에 대한 답을 내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될 것이다. 

그래도 한 번 생각해본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제일 처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이 죽으면 사고가 정지하는 걸까. 그렇다면 사고가 정지하는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사고가 정지한다는 것을 느끼려면, 사고가 정지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어떠한 느낌인 것인가. 이러한 생각은 정말 나를 두려움으로 몰아넣는다.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 생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무경험에 대한 두려움은 실로 엄청나다. 특히 어떠한 간접경험도 존재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서는 누구의 말도 믿을 수가 없으며 오직 자신만이 맞닥뜨려야만 한다. 

이십대가 바라보는 죽음이란 _1
시간의 흐름은 막을 수가 없다
그러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생애를 살아가진 않을까하는 희망을 또 품게 되는 것 같다. 불교의 윤회설이 대표적인데, 죽음 뒤에 또 다른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특정 종교를 신봉하지는 않지만 단지 윤회설도 일리 있는 이야기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있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끝없이 새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천계가 존재한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 천국과 지옥같이 양분화된 곳을 상상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죽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을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 말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모두 한 가지 생각에서 나온듯 하다. 바로 지금의 우리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동물이 자의식을 가지고 있기는 하겠지만, 인간의 사고력은 뛰어나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각할 수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할 수도 있다. 이런 특권을 잃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도 20대라는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내가 이러한 생각들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다음 생애 무엇이 되어 태어날 수 있거나,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거나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거나 한다 해도 지금의 나는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죽음은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을 행복하게 사용하며, 살아있음을 감사할 뿐이다. 더욱 즐거운 내일을 위해서 지금 열심히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을 바라보는 최선의 선택이다.

친구, 교통사고, 죽음, , 유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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