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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으로 떠나는 여행'에 동행하다
역사를 배우며 학문의 즐거움을 느낀다
2009-12-10 14:46:35최종 업데이트 : 2009-12-10 14:46:35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올 한해는 정조의 비밀편지가 세상에 발표되면서부터 유달리 정조대왕이 언론에 많이 올랐다. 정조대왕과 수원은 뗄 수 없는 사이로 '수원화성'이 그 유산물이다. 따라서 전공자 뿐 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소모임이나 단체에 가입해 정조시대와 화성을 연구하고 있다. 

이에 시민기자도 좀 더 깊이 공부하고자 지난주부터 수원화성운영재단에서 주최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제4회 '정조 실록학교'에 등록하여 현재 수원화성박물관에서 박현모 강사님의 강의를 듣고 있다. 

'정조실록으로 떠나는 여행'에 동행하다_1
'정조실록으로 떠나는 여행'에 동행하다_1

이 강좌는 특강형식으로 주 2회 3주간 진행되는데, 이전의 암기 주입식 역사공부와는 차별화된 강의와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영조로부터 물려받은 무거운 유산 즉, 사도세자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규장각을 통한 지식경영 리더십은 어떠했는지, 탕평정치의 본질은 무엇인지 등 정조 실록을 근거로 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나아갈 바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본 강의 전에 초빙강사의 특별한 강의가 한 시간 정도 주어진다.
매시간 전공이 다른 선생님들의 열강은 배우는 학생들에게 또 다른 학문의 즐거움을 일깨워 주고 있다. 한문학자 심경호 선생님의 '표암 강세황의 예술세계'와, 어제 들은 정해은 선생님의 '조선의 여성들'이 그것이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군주 정조대왕. 즉위 초반 정치적 소수파였던 정조가 노론벽파의 견제와 위협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24년간 정권을 유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충'과 '효'를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또 적재적소에 알맞는 인재를 기용한 탕평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즉, 할아버지 영조와 사도세자의 문제처리 과정과 종친의 문제를 '군신의 윤리'와 '효친의 윤리'의 모순을 '권도(權道)'론으로 피력하고 원칙을 비껴나며 성왕의 정치를 정당화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독서를 해 온 호학(好學)군주 정조의 규장각을 통한 정치의 산물일 것이다.

이처럼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왕실의 위엄을 확립하기 위해 창덕궁 후원에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한다. 역대 왕들의 어제, 어필 등을 정리 봉안하고 서적을 수집, 편찬하며 학술정치의 공간으로 삼아 국가를 지식 경영해 나간다.

'정조실록으로 떠나는 여행'에 동행하다_2
'정조실록으로 떠나는 여행'에 동행하다_2

규장각 각신(고위관료 중심), 초계문신(중견관료), 검서관(서자로 임명. 자문역할)의 인적자원이 모여 '싱크 탱크'를 구성한 이들은, 임금이자 스승임을 자처했던 군사(君師) 정조와 토론의 정치를 이끌었다.
규장각 설립의 배경은 '문명의 정치' '국왕의 정치기반구축' '친신(親臣)' '탕평'이었던 것이다. 

12월 2일 시작한 총 6회의 강의안 중에서 이제 세 번만을 남겨두고 있다. 정조의 탕평책과 인재는 어떻게 기용했는지, 정조대 개혁의 논쟁과 개혁의 조치들은 무엇이었는지 등 몇 가지만을 남겨 두고 있다.
조금은 어려워 단시간에 알기 힘든 수업이다. 그래도 학문의 즐거움을 무기삼아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다가가려 한다. 

* 정조 실록의 특징
첫째, 정조 재위 24년 4개월간의 역사기록으로 일반적인 편년체제(연대기, 54권)와 부록(2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편년체: 역사적 사실이 일어난 순서대로 서술하는 방식)
둘째, 정조 승하 후 1800년 12월부터 편찬되기 시작해 1805(순조5년) 8월에 완성되었다.(4 년 8개월)
셋째, 본래는 <정종실록>으로 편찬되고 명명되었으나 1899년에 대한제국으로 국격(國格)을 올리면서 묘호도 정조로 추존되어 <정조실록>으로 되었다.
넷째, 실록 편찬자 사관(史官)의 개입이 최소화되어 있다.

정조실록, 수원화성, 화성박물관, 박현모, 탕평정치, 사도세자, 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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