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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교동 100년 역사를 기억하는 전시회
‘수원 교동 유적: 구 부국원 발굴 이야기', 6월 30일까지 열려
2024-03-18 10:27:19최종 업데이트 : 2024-03-18 10:27:17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수원 교동 유적: 구 부국원 발굴 이야기'가 수원 구 부국원에서 열린다. 일제강점기 때와 해방 이후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수원 교동 유적: 구 부국원 발굴 이야기'가 수원 구 부국원에서 열린다. 일제강점기 때와 해방 이후 역사를 만날 수 있다.


 2024년 상반기 기획전시 '수원 교동 유적: 구 부국원 발굴 이야기'가 근대 문화 공간 수원 구 부국원(팔달구 향교로 130, 교동)에서 열린다. 일제강점기에 부국원 설립으로 형성된 신작로 이야기와 해방 이후 부국원 건물의 역사를 6월 30일까지 만날 수 있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 개통과 동시에 수원역이 영업을 개시했다. 일제강점기에 수원역에서 향교 쪽으로 신작로가 개설되고 이 지역에 일본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부국원이 여기에 선 이유도 이런 배경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부국원 건물 관련 자료. 발굴 현장에서 나온 건축 타일, 창틀, 벽돌, 강돌, 콘크리트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

부국원 건물 관련 자료. 발굴 현장에서 나온 건축 타일, 창틀, 벽돌, 강돌, 콘크리트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뒤, 본격적인 한반도 침탈을 시작했다. 농업 분야에서도 자기들 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했다. 부국원은 권업모범장에서 종묘와 종자를 공급받아 판매했던 회사다. 일본인이 설립했고 수원역 앞에서 시작하다 이곳에서 영업했다.

온실에서 발굴한 화분. 100년의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상태가 비교적 좋다.

온실에서 발굴한 화분. 100년의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상태가 비교적 좋다.


 1930년대 발간된 자료에는 부국원이 본관 외에도 창고 3개 동과 온실 등을 보유한 300여 평(약 990㎡) 규모였다고 나온다. 종자부, 묘목부, 농구 잡화부, 비료부 등 6개의 부서를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다. 부국원 건물이 교동 일대에 넓게 퍼져 있었다는 뜻이다. 
 
1920년대 부국원은 부속시설 등이 있어 교동 일대에 넓게 퍼져 있었다.

1920년대 부국원은 부속시설 등이 있어 교동 일대에 넓게 퍼져 있었다.


 김성미 주무관(수원특례시 문화예술과 문화재 활용팀)은 "부국원 건물 뒤쪽으로 주상복합빌딩 신축 사업을 하게 됐다. 이 지역은 부국원 부속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관련된 유적이 있을 것으로 판단해 2020년 11월부터 2021년 2월까지 발굴 작업을 했다. 올해 발굴 결과가 나와서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전시를 하게 됐다."라고 말한다.

 전시장에서는 당시 부국원 전체 시설을 볼 수 있다. 그동안 온실은 부국원 월보에 실린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는데, 모종이나 종자 등을 키우던 온실 유구(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 따위를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잔존물) 2동이 확인됐다. 온실에서는 난방을 위한 화로 시설이 있었다. 계절과 관계없이 다양한 작물을 재배했다는 증거다. 화분도 많이 나왔는데, 다양한 원예작물을 재배했음을 알 수 있다.

부국원 월보. 종자, 종묘, 원예, 농기구, 비료를 판매하기 위해 발행했는데, 우리말과 일본어를 같이 썼다.

부국원 월보. 종자, 종묘, 원예, 농기구, 비료를 판매하기 위해 발행했는데, 우리말과 일본어를 같이 썼다.


 모내기 전까지 모종을 육성하는 육묘장은 부국원 월보에 조감도 등을 보고 온실 사이에 있었다고 추정했다. 이번 발굴 결과 다수의 육묘 유구도 확인됐다. 여기서 재배한 작물이 보리, 조, 포도, 복숭아 등이다. 이 밖에 전시장에는 당시 배수로, 우물, 화분 출토 사진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화분, 토기, 도기류 등은 100년의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나이 먹은 티가 전혀 안 난다. 

  부국원 영업 안내 책자도 귀중한 유산이다. 종자, 묘목, 비료 품목을 소개하는 영업 안내를 하고 있다. 월보는 종자, 종묘, 원예, 농기구, 비료를 판매하기 위해 발행했는데, 우리말과 일본어를 같이 썼다. 1930년대는 50만 부를 발행해 일본, 만주까지 배포했다. 월보를 이용해 통신으로 주문을 받고 우편으로 상품을 판매했다. 요즘 말로 하면 오라인 판매다. 

부국원 건물은 해방 이후 수원법원과 검찰 청사로 사용했다. 부국원 내부모습도 볼 수 있는 귀한 사진이다.

부국원 건물은 해방 이후 수원법원과 검찰 청사로 사용했다. 부국원 내부모습도 볼 수 있는 귀한 사진이다.


 부국원 건물 관련 자료도 볼만하다. 1930년대 외관 모습 사진이 있다. 건축 자재로 타일, 창틀, 벽돌, 강돌, 콘크리트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 부국원 옛 벽체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흥미롭다. 

 영상을 통해 신작로 사람들 삶과 이야기도 감상할 수 있다. 신작로 거리를 일본 의상을 한 여인들이 애기를 업고 걷고 있다. 교동은 산루리라고 했는데, 박선태 등 여기 출신 독립운동가 사진도 볼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사람들의 남루한 일상이 애잔하게 상영된다.

부국원 주변 유적 발굴 현장 사진.

부국원 주변 유적 발굴 현장 사진.


 부국원 건물은 해방 이후 '수원법원‧검찰 임시청사(1952~1956)', '수원시 교육지원청(1950년대 말~1963년)', '공화당 경기도당 당사(1960~1970년대)' 등으로 활용됐다. 1981년부터는 '박내과의원'으로, 2000년대는 한솔문화사 등으로 이용되며 버텨왔다.

부국원 건물은 병원, 사무실 등으로 되고, 최근에는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부국원 건물은 병원, 사무실 등으로 되고, 최근에는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관공서와 병원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하던 건물은 2015년에는 철거 위기에 놓였다. 다행히 수원시가 매입 후 복원하고 관리하면서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로써 미래 지향적으로 보존,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남은 것은 우리의 몫이다. 시민들이 건강한 역사의식을 되짚게 하는 공간으로 활용해야 한다. 지나간 시대의 아픔까지 따뜻하게 감싸주는 공간으로 성장시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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