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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모니터링
화성성역의궤 기록과 실제의 모습 비교하기도...
2023-10-11 13:21:26최종 업데이트 : 2023-10-11 13:21:24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화성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수원화성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수원화성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은 축성 당시부터 명승지로 유명했다. 그 명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09년 발행된 1원짜리 지폐에 화홍문이 도안으로 들어갈 정도로 그 위상이 대단했다.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주변에는 늘 많은 관람객이 아름다운 풍경을 즐긴다.

(사)화성연구회는 지난 10일 오후에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에 대해 모니터링을 했다. 이곳은 관람객이 많이 찾는 명소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스토리가 풍부하고 복원하는 과정에 미스터리가 있다. 화성성역의궤 기록과 실제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는 교육의 현장이기도 하다. 

수원화성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수원화성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수원화성은 축성을 시작하면서 수원천을 준설했다. 수원화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은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기 때문에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수원천의 폭을 넓히고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한 것이다. 화홍문과 남수문 구간뿐 아니라 화홍문 밖 5백 – 600보(586m - 703m)까지 준설을 했다. 너비는 20여 보(23.4m), 깊이는 반 장 혹은 1장(1.5m – 3m)으로 팠고 매년 여름 장마가 걷히면 반드시 개울을 쳐서 소통시키는 것을 연중행사로 삼았다. 물을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화홍문은 1794년 7월 9일 주춧돌을 놓고 10월 13일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했고 1795년 1월 13일 누각이 완성되었다. 화홍문은 수원천 위에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세운 구조이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다리의 너비는 31척(9.6m), 길이는 95척(29.3m)이다. 바깥쪽 장대 위에는 누조 7개를 설치하고, 안쪽은 누혈 6개를 뚫었다."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이다. 도설의 홍예 돌다리 모습을 봐도 안과 밖에만 홍예로 되어있다.

수원화성 화홍문

수원화성 화홍문


1846년 6월 15일 '수원부계록'에 의하면 "이번 9일의 비는 밤낮으로 하루 종일 쏟아졌는데 거의 강수량이 2척(39cm)이었으며 하천물이 크게 불어나서 북수문(화홍문) 아래에 깔린 전돌이 뒤로 밀려서 떠내려갔고 내홍예석문 및 그 위에 포설한 청판석이 모두 무너졌으니 문루는 따라서 전체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남수문 밖 홍예석문 및 그 위에 포설한 청판석도 모두 무너졌고 매향석교 또한 모두 파괴되었습니다."라고 기록했다.

1848년 6월 10일 자에는 "1847년부터 석재를 부출하고 기와를 구웠고 같은 해 9월 북수문의 박석과 홍예석은 먼저 쌓기를 마쳤고, 북수문, 남수문, 매향교, 남창교는 개건(改建)했다."라고 기록했다. 기록을 보면 화홍문 홍예석교와 누각이 모두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데, 북수문 전체가 무너졌다고 하면 될 것 같은데 표현이 애매하다. 개건이란 고쳐 세우는 것을 말한다. 다시 세웠다는 것은 아니다.

수원화성 화홍문 밖 모습, 오른쪽 홍예 위가 살짝 내려앉은듯 하다.

수원화성 화홍문 밖 모습, 오른쪽 홍예 위가 살짝 내려앉은듯 하다.


현재 화홍문 홍예석교의 모습은 화성성역의궤 설명과 도설과는 다르게 안팎 홍예 사이가 돌기둥으로 되어있지 않고 전체가 홍예로 되어있다. 돌기둥 4개를 세우는 것과 전체를 홍예로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홍수 피해 후 복원할 당시에 튼튼하게 하기 위해 현재의 모습처럼 공사를 한 것인지, 처음부터 현재의 모습인지는 불확실하다.

1922년 홍수 때에도 누각이 무너졌다. 두 번이나 무너졌는데 화홍문 현판이 당대의 현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색하다. 현판을 구성하는 나무가 당대의 것이라고는 하지만 유한지가 쓴 예서체 글씨는 원래 유한지 글씨에서 변형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축성 당시에 쓴 글씨를 현판으로 만들고 그 현판을 탁본한 원본을 무너진 이후에 다시 복각하기를 반복하면서 서체에 변형이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수원화성 화홍문 현판

수원화성 화홍문 현판


수원화성 축성 후 정조대왕은 화성 춘 8경과 추 8경을 정하고 김홍도에게 병풍으로 그리게 했다. 추 8경 중 홍저소련(虹渚素練, 화홍문 물가에 흰 깁을 편 듯함), 용연제월(龍淵霽月, 용연의 개인 달)이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김홍도는 '방화수류도'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방화수류정이 중심에 있었을 것인데 그림이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다.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용연 주변에는 항상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모두가 수원화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 훼손하지 않고 아껴야 우리 후손에게 아름다운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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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화홍문, 방화수류정, 화성연구회, 모니터링,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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