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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시대 제주 여걸, 김만덕을 아시나요?
기부 통해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 구제
2023-11-02 09:55:49최종 업데이트 : 2023-11-02 09:55:48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정조시대 제주 여걸, 김만덕을 아시나요? 인문학 강의가 열린 수원화성박물관

정조시대 제주 여걸, 김만덕을 아시나요? 인문학 강의가 열린 수원화성박물관


지난 1일 저녁 수원화성박물관에서 2023 문화도시 조성사업 '정조 시대의 사람들' 인문학 강의가 열렸다. 이날 '김만덕-정조시대 제주 여걸 기부로 이름을 떨치다'라는 주제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정해은 책임연구원이 강의를 이끌었다. 

1792년부터 1795년까지 제주에서는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국왕 정조는 전라도에 명해 급히 구호 곡식을 보냈으나 백성을 구제하기에는 많이 모자랐다. 1794년에는 국가에서 보낸 구호 식량이 풍랑으로 도착하지 못해 제주 백성이 곤궁한 처지는 말이 아니었다.

이런 참상을 마주한 김만덕(1739-1812)은 본인의 재산을 굶주리는 이웃을 위해 희사했다. 1796년 전라도 상인에게 급히 양식을 사서 제주도로 운반했다. 이때 사들인 백미 60섬을 관아에 실어 보냈다. 이 어려운 시절에 제주목에서 백성 가운데 이웃을 위해 본인의 재산을 희사한 사람은 김만덕이 유일했다.

정조시대 제주 여걸, 김만덕을 아시나요? 인문학 강의가 열린 수원화성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정해은 책임연구원의 열강.

정조시대 제주 여걸, 김만덕을 아시나요? 인문학 강의가 열린 수원화성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정해은 책임연구원의 열강.


제주 목사는 김만덕이 어떤 이득을 바라지도 않고 한 선행을 "재물을 가볍게 여길 줄 아니 비천한 무리가 잘하기 어려운 일입니다"라며 정조에게 보고했다. 정조는 김만덕의 선행을 훌륭히 여겨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주라고 명했다. 만덕은 "한양에 가서 임금이 계시는 대궐을 우러러보고 금강산 구경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당시의 상황이 기록된 일성록(1796년 7월 28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전교하기를, 많은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해 살렸는데 그 일이 조정에 보고되었다. 그에게 소원을 물으니 상을 받는 것도, 면천되는 것도 원하지 않고 다만 바다를 건너 서울에 올라와 보고 그 길에 금강산을 볼 수 있기를 소원한다고 했는데 마침 한겨울이라 출발할 수 없었다. 그가 비록 천인이기는 하지만 의로운 기상은 옛날의 정의로운 협객에 부끄럽지 않다. 봄이 올 때까지 양식을 주고 곧바로 내의원의 차비 대령인 행수 의녀로 충원하고 수의에게 소속시켜 각별히 돌봐 주도록 하라. 그리고 금강산을 구경하고 나서 되돌아갈 때 연로의 도신에게 분부해 양식과 경비를 넉넉히 주게 하라." 김만덕의 선행에 대한 정조의 특별 배려가 눈길을 끈다.

정조시대 제주 여걸, 김만덕을 아시나요? 인문학 강의가 열린 수원화성박물관, 추사 김정희가 써준 '은광연세'

정조시대 제주 여걸, 김만덕을 아시나요? 인문학 강의가 열린 수원화성박물관, 추사 김정희가 써준 '은광연세'


한양으로 올라온 김만덕은 궁궐에 들어와 인사를 올리고 겨울을 보낸 후 1797년 늦은 봄에 금강산을 구경하고 제주로 돌아갔다. 정조는 금강산으로 가는 경비를 지원해 주었다. 김만덕의 이야기가 단순히 성공한 사업가에 그쳤다면 역사가 그의 이름을 기억했을까?

번암 채제공은 한양에 올라온 김만덕을 물심양면으로 돌봐 주었다. 금강산 유람을 끝내고 제주로 돌아가기 직전 울먹이면서 하직 인사를 올리자 "너는 제주에서 태어나 자라 백록담 물을 마시고 이제 금강산도 두루 살폈다. 천하의 수많은 남자 중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지금 이별하는 마당에 도리어 아녀자처럼 한탄하는 태도를 하는 건 무슨 까닭인고?" 하고 위로하면서 친히 '만덕전'을 지어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병조판서 이가환은 김만덕에게 송별시를 지어주었다.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인일세/ 예순 얼굴이 마흔쯤으로 보이는구려/ 천금 내어 쌀 사들이고 백성을 구제하였으니/ 한번 바다 건너 궁궐을 찾아 뵈었구려..." 다산 정약용은 '제주 기생 만덕이 얻은 진신대부의 증별시권에 제함'이란 글에서 "만덕에게는 세 가지 기특함과 네 가지 희귀함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라고 했다.

제주도에 있는 김만덕 기념관 홈페이지

제주도에 있는 김만덕 기념관 홈페이지


1840년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를 간 추사 김정희는 김만덕의 진휼 선행에 감동했다. "김종주의 할머니가 제주에 기근이 들어 크게 베풀자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금강산을 가기에 이르렀다. 여러 관료들이 모두 기록으로 전하고 시로 읊었으니 이는 고금에 드문 일이다. 이 편액을 써주어서 그 집안을 기리고자 한다."라며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의 빛이 세상에 퍼지다)'라는 글씨를 써주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인 김만덕은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여자 상인으로 조선 사회에 우연히 등장한 인물이 아니었다. 당시의 정치, 경제적 상황을 자세히 검토하면서 정조가 김만덕에 주목한 이유는 '여민동락'의 실천이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강의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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