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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향교 ‘대성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잘 보존해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할 문화유산
2021-01-07 10:24:26최종 업데이트 : 2021-01-07 10:24:20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2020년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수원에 경사가 있었다. 12월 29일 수원향교 대성전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제2090호)로 지정돼, 수원의 새로운 문화재로 비상했다.

2019년 7월 4일 왕의 어진을 모시는 수원 화령전의 '운한각·복도각·이안청'이 보물로 지정되고, 1년 만에 다시 수원에 보물이 탄생했다. 10월 22일에는 번암 채제공의 초상화 두 점(보물 제1477-2호 <채제공 초상 금관조복본>과 보물 제1477-3호 <채제공 초상 흑단령포본>)이 수원화성박물관에 기증됐으니, 2년 사이에 수원에는 보물 문화재가 많아졌다.

수원향교를 가면 입구의 홍살문과 하마비가 먼저 반긴다. 홍살문은 능·원·묘·궁전 또는 관아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문이다. 이 문을 지날 때는 경의를 표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마비도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이 앞을 지나갈 때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으로 향교의 권위를 나타낸다.
수원향교 대성전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제2090호)로 지정됐다.

수원향교 대성전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제2090호)로 지정됐다.

 
수원향교는 팔달산 자락에 앉아 있다. 그래서 입구부터 경사진 곳을 따라 올라간다. 화성성역의궤 기록에 외신문 14보쯤에 홍살문이 있다고 했는데, 걸어보니 더 된다. 우측에 관리사무소를 방문하니 동행을 해 주신다. 향교 문을 열어주시며 설명도 자세히 해 주신다.
 
협문으로 들어서면, 명륜당이 보인다.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고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향교가 성균관의 하급 관학으로 지방의 교육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는 시설물이다. 화려한 장식이 없는 소박한 건물이지만, 뜻을 잃지 않았던 선비들처럼 단아함이 느껴진다. 뒤로 돌아오니 아궁이가 보인다. 저 작은 아궁이가 혹한의 추위를 녹였을까. 젊은 선비들은 내일의 희망으로 의연하게 버텼을 것이다. 그들의 뜨거운 열정이 상상으로 들어온다. 명륜당 마당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유생들이 기숙하던 장소로 동재는 상급생이, 서재는 하급생이 사용했다. 조선 후기에는 신분이 높은 양반들이 동재를, 평민 출신의 학생들이 서재를 사용했다.
 
대성전을 들어가려면, 내삼문을 지나야 한다. 이 문에 오르는 계단이 가파르다. 입구의 외삼문과 같은 모양으로 솟을대문 형식이다. 대성전은 높은 대 위에 앉아 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이 높이를 '대 아래는 3계단이고 보석은 5층'이라 했다. 앞면 5칸·옆면 3칸 건물로, 맞배지붕집이다. 제사 의례에 적합하도록 앞면에 개방된 마루를 두었다. 건물보다 길게 뻗은 기와지붕이 멋지게 보이기도 하고, 엄숙하고 경건한 느낌도 든다. 널찍한 마당에 별다른 장식도 없는 건물이 위엄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1795년에 원행을묘행차 때 정조대왕이 수원향교 대성전에 전배를 했다. 당시 장면을 그린 그림. 왼쪽부터 삼성박물관(보물1430호),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우학문화재단에 있음.

1795년에 원행을묘행차 때 정조대왕이 수원향교 대성전에 전배를 했다. 당시 장면을 그린 그림. 왼쪽부터 삼성박물관(보물1430호),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우학문화재단에 있음.


앞마당에는 좌우로 동무 서무가 있다. 동무와 서무는 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집이었지만, 대성전으로 올려다 모시고 지금은 비어 있다. 문화재청이 보물 지정을 하면서 설명한 것처럼, 남북의 축을 따라 동·서에 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고 공간구성이 위계성을 보인다. 가장 안쪽에 제향 기능을 갖춘 대성전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아래는 강학 기능을 하는 명륜당이 있으니,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공간 배치다.
 
보물로 지정된 곳은 대성전이다. 이곳에는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오성과 송나라의 2현(정호와 주희), 우리나라의 대유학자 18현(신라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의 안유와 정몽주, 조선의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다. 조선 유학의 상징이며, 유교 이념의 중심지다.
 
수원향교는 1291년(충렬왕 17)에 수원의 읍 중심이었던 화성시 봉담읍 와우리 화산 앞에 창건되었다. 여기서 500년 세월 동안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제사 등을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힘썼다. 1789년(정조 13)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천장했다. 이때 수원읍지를 팔달산 동쪽 사대문 안으로 옮겼다. 보통 향교는 지방 관아 혹은 객사와 가까운 곳에 있다. 해서 수원향교도 수원부 남쪽 3리쯤에 옮겨지었다. 향교가 현 위치로 이건되고 대성전이 새로 지어지는 과정은 '화성성역의궤' 등의 문헌에 상세히 전한다.
 
처음 이전 당시에는 급히 서두른 탓으로 목재 대부분은 구건물의 것을 재활용하였으며 건물의 하부가 물에 잠기어 목재가 썩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는 당시 수원 유수 조심태의 장계에 잘 나타나 있다. 이에 따라 1795년(정조 19) 재건축하게 되었다.
팔달산을 등지고 앉아 있는 수원향교는 입구에 홍살문과 하마비가 보인다. 여기를 지날 때는 경의를 표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향교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팔달산을 등지고 앉아 있는 수원향교는 입구에 홍살문과 하마비가 보인다. 여기를 지날 때는 경의를 표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향교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수원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전교 1명과 장의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동행한 이종진 장의는 "향교는 제향과 강학 기능이 중심이다. 오늘날에도 매달 음력 초하루(1일)와 보름날(15일)에는 분향례를 올리고 봄과 가을에는 석전(제례)을 하고 있다. 그리고 명륜대학에서 유교 경전 가르쳐 전통 윤리를 보급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문화재 보호 관리는 물론 시민과 함께 할 수 있는 교육과 전통문화 보급에 대해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을 이었다.
 
수원향교 대성전의 보물 지정으로 수원은 문화 도시의 모습을 더욱 굳건히 했다. 이는 정조대왕이 건축을 지시하고 정성으로 세워진 문화유산이다. 정조대왕은 원행을묘행차 때 수원행궁에서 하루를 머무르고, 다음 날 아침 일찍(묘시) 직접 향교에 가 배향에 참여했다. 왕이 첫 번째 행사로 향교를 참배했다는 것은 당시 향교가 그만큼 중요 공간이었음을 상징한다. 이런 역사성이 담겨있는 향교는 단순히 박제된 공간만이 아니다. 지금 사람들이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승하는 공간으로 발전하기를 기원한다.
 
협문을 나서려는데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향교의 파수꾼처럼 서 있다. 오랜 시간을 지켜온 듯 고목의 풍모를 지니며 향교의 분위기에 맞게 기품이 있어 보인다. 이 나무도 우리가 지켜야 할 유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향교의 풀 한 포기까지 잘 보존하여 다음 세대에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전달하는 것이 우리가 보물을 즐기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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