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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에 있지만, 누구도 우쭐댈 수 없는 표지 하마비
수원 하마비를 찾아서 마음을 돌아본다
2021-03-16 15:36:44최종 업데이트 : 2021-03-16 15:36:42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화성행궁 앞에 있는 하마비. 수원 하마비 중에 가장 크다.

화성행궁 앞에 있는 하마비. 수원 하마비 중에 가장 크다


하마비는 조선 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 놓은 비석이다. 왕이나 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 놓기도 했는데, 사찰 일주문 밖에 세운 예도 있다. 성균관을 비롯한 각 지방의 문묘 밖 홍살문에도 세웠다.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 이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이자 예에 합당했기 때문이다.

화성행궁에 들어가려면 홍살문과 신풍교를 지나야 한다. 이 홍살문 우측에 하마비가 있다. 높이는 142㎝, 폭 47㎝, 두께 27.5㎝로 행궁에 어울리게 수원 하마비 중에 가장 크다. 테두리 안에 보호받고 있고, 상태도 좋다. 

 1795년은 정조대왕의 부모인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태어난 지 만 60년이 되는 해다. 동시에 정조가 즉위한 지 20년이다. 특별히 경사스러운 일이 겹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는 대대적인 행사를 했다. 아버지 묘에 참배하고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화성에 하기로 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누이동생 둘을 데리고 돈의문을 나섰다. 호위 인원이 약 6천 명이었고, 말은 700필이 넘었다(능행반차도에는 사람 1,779명과 말 779필을 그림). 조선 개국 이후 보기 드문 왕의 행차였다. 왕은 그 어느 때보다 위엄이 있었고, 늠름했다. 이 거대한 행차에 주인공 정조를 비롯해 모든 대신은 화성행궁 입구의 하마비에 당도해서는 말에서 내려 몸을 낮춰야 한다.

화령전 외삼문 앞에 하마비는 사람들이 지나는 길가에 있지만, 훼손된 흔적이 없다.

화령전 외삼문 앞에 하마비는 사람들이 지나는 길가에 있지만, 훼손된 흔적이 없다

 
화령전 외삼문 앞에도 하마비가 있다. 사람들이 지나는 길가에 있지만, 훼손된 흔적이 없다. 높이는 135㎝, 폭 51㎝, 두께 23.5㎝다. 여기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즉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글이 새겨 있다.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을 모신 정전 운한각이 있다. 대신이나 고위 관료들이 왕명이나 다른 공무로 화성부를 들르게 되면 반드시 화령전에 나아가서 공손히 절을 올리도록 하는 규정('화령전응행절목')이 있다. 왕의 초상화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던 건물 앞이니, 신성한 공간이다. 당연히 하마비가 있어, 예를 표해야 했다. 

 
지지대 고개에 지지대 비각이 있다. 이 비각에 오르는 계단 아래에 하마비가 있다.

지지대 고개에 지지대 비각이 있다. 이 비각에 오르는 계단 아래에 하마비가 있다.



의왕에서 수원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지지대 고개에는 지지대 비각이 있다. 이 비각에 오르는 계단 아래에 하마비가 서 있다. 높이 102㎝, 폭 48.5㎝, 두께 29㎝로 작은 편이다. 여기에는 화령전에 있는 하마비와 같은 내용을 썼다.  

 지지대는 사근현이라 했다. 1792년(정조실록 34권, 정조 16년) 기록에 어가가 사근현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잠시 쉴 때 "이 지역은 바로 수원의 경계다. 말에서 내려 머무르며 경들을 불러 보는 것은 대저 나의 행차를 지연시키려는 뜻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지역을 지지대라고 명명했다. 

 1795년(정조실록 42권, 정조 19년)에는 "매번 현륭원을 참배하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미륵현에 당도할 때면 고삐를 멈추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한 채 나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내려 서성이곤 하였다.(중략) 이 뒤로는 행행하는 노정에 미륵현 아래에다 지지대라는 세 글자를 첨가해 넣도록 할 일을 본부와 정리소에서 잘 알아서 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기록을 보면 정조가 지지대라고 했는데, 잘 쓰이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아예 '행행하는 노정'에 써넣으라는 지시를 했다. 이때부터 지지대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듯하다. 그러다가 순조 때 지지대에다 사적을 기록한 비석을 세우라고 명하고, 1808년 무렵에 비각이 완성됐다. 

지지대 고개는 그 자체로 신성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정조대왕도 말에서 내려 아버지와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그러니 누구든 이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마비가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원 향교 입구 하마비. 허리춤도 떨어져 나갔고, 돌 색깔도 누렇게 변했다.

수원 향교 입구 하마비. 허리춤도 떨어져 나갔고, 돌 색깔도 누렇게 변했다


수원향교 입구 홍살문 왼쪽에 하마비가 있다. 높이가 79㎝, 폭 31㎝, 두께 20㎝로 조금 작다. 허리춤도 떨어져 나갔고, 돌 색깔도 누렇게 변했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보호 장치를 두르고 있지만, 오가는 차량 때문에 불안하기는 여전하다. 일본주재 독일대사관 장교였던 헤르만 산더가 일본인을 고용하여 1906년 1907년 사이에 찍은 사진에는 하마비가 향교 입구 홍살문 오른쪽에 있었다. 아마 도시 정비 중에 현재의 위치(홍살문 왼쪽)로 옮겨진 듯하다.  
 
1795년 창덕궁을 나선 행렬은 시흥 관아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해서 사흘째 되는 윤2월 11일 아침 일찍 수원에서 첫 행사로 수원향교 대성전에 전배한다. 향교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국왕도 전배하러 오는 성현의 위패가 있다. 하마비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낙선재가 있다. 이 안에 들어서면 마당에 가마를 타거나 말을 탈 때 딛고 서는 디딤돌이 있다. 이 돌을 노둣돌이라고 하는데, 하마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마석은 위를 둥글게 조형해 하나의 돌을 세워 놓는데, 노둣돌은 보통 직육면체에 가까운 커다란 돌을 석계처럼 잘 다듬어 기단 앞에 놓아두거나 솟을대문 옆에 놓아두기도 한다. 

 하마는 말에서 내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내린 다음이 문제다. 궁궐이나 제사 공간이 있으니 최소한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 하마비는 개념적 의미가 중요한 것이고, 노둣돌은 기능적 의미가 있다. 

 하마비는 길거리 낮은 곳에 있지만, 여기서는 누구도 우쭐댈 수 없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존경과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예를 갖추어야 한다. 하마비는 빠르게 변화는 세상에 기능을 잃었다. 기능은 없어졌지만, 회상의 기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길을 지나다 하마비를 만나면, 말에서 내리듯 자신을 낮추는 마음가짐도 돌아보자. 문화유산의 가치를 새기며 삶을 성찰하는 것이야말로 문화유산을 제대로 즐기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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