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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화홍문을 닮은 만안교
쌍둥이 홍예수문의 내력은
2020-11-04 22:10:35최종 업데이트 : 2020-11-05 15:36:07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안양천에 있는 만안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안양천에 있는 만안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

"남충현(현재의 과천) 관아 남쪽 20리에 안양천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화성으로 가는 행차길이다. 우리 성상께서 해마다 원침(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을 참배하려면 이 하천을 건너게 된다. 올봄(1795년)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이 하천을 건넘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대체로 행차길에는 하천이 있고 반드시 다리가 있기 마련인데 이들 다리는 나무로 놓였다가 왕이 행차한 뒤 바로 철거하였다. 따라서 얼음이 풀릴 때와 장마가 질 때에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였다. 신(경기관찰사 서유방)이 명을 받고 초가을 음력 7월에 일을 착공하여 3개월 만에 준공하였다" 안양천에 놓인 만안교(萬安橋碑) 건설에 대한 내용이다.

안양천에 있는 만안교, 하류 방향에서 본 모습

안양천에 있는 만안교, 하류 방향에서 본 모습

 

만안교 옆에는 만안교 건설에 대한 내력을 새긴 만안교비가 있다. 비문은 서유방이 지었다. 전면의 '만안교' 글씨는 유한지가 예서체로 썼고 비문은 조윤형이 썼다. 유한지는 수원화성 화홍문 글씨를 예서체로 썼고, 조윤형은 수원화성 팔달문, 장안문, 방화수류정, 화성행궁 신풍루, 봉수당, 낙남헌 글씨를 썼다.

비문 끝에는 "감동 첨사 김천보, 영패 가선 서협수, 각수편 이삼흥, 치장편수 정일성, 오위장 장정, 영교 가선 서의린, 석수편수 최귀득, 오위장 김대연, 영리 이효석, 박복돌, 오위장 김원섭, 홍예편 최흥서" 등 만안교를 건설한 책임자들의 실명이 기록되어 있다.
 

안양천에 있는 만안교,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만안교비

안양천에 있는 만안교,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만안교비


만안교 길이는 약 31.2m, 너비는 약 8m이고 7개의 홍예 수문으로 되어있는데 홍예의 너비는 약 3.1m이다. 수원화성 화홍문 길이는 29.3m, 너비는 9.6m이고 7개의 홍예 수문으로 되어있다. 홍예의 너비가 6개는 8척(2.47m), 1개는 9척(2.78m)이다. 만안교 다리 위에 누각이 없을 뿐 수원화성 화홍문과 쌍둥이처럼 똑같다. 홍예 수문이 터널처럼 되어있고 상류 방향에는 선단석(물가름돌)의 모양도 똑같다. 다만 만안교는 다리 중심부로 갈수록 약간 높게 건설됐다. 

안양천에 있는 만안교, 상류 방향에서 본 모습

안양천에 있는 만안교, 상류 방향에서 본 모습


화홍문은 1795년 1월 13일 완성되었고 만안교는 9월에 세워졌기 때문에 두 다리의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됐다. 만안교비에 새겨진 기술자들의 이름을 화성성역의궤에서 찾아보았다. 석수편수 취귀득은 341일 동안 부석소, 북성, 화홍문, 방화수류정, 북동포루 등에서 일했고, 박복돌은 380일간 수원화성 축성에 참여했다. 최소한 2명의 석공이 만안교를 건설하는데 참여한 것이고 최귀득이 석공장의 책임자였다.

안양천에 있는 만안교, 상류 방향에서 본 모습, 화홍문과 선단석 모양도 똑같다.

안양천에 있는 만안교, 상류 방향에서 본 모습, 화홍문과 선단석 모양도 똑같다.


현재 남아있는 화홍문과 만안교를 비교하면 쌍둥이처럼 비슷하지만 원형이 같았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만안교는 원래 건설했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는 했지만 건설 당시의 원형 그대로이다. 그렇지만 화홍문은 원형이 현재 모습과 다른 것으로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되어있는데 기록이 정확한지도 알 수 없다. 

만안교비, 유한지가 썼다.

만안교비, 유한지가 썼다.


화성성역의궤의 '북수문(화홍문) 내도', '북수문 외도', 북수문 설명을 보면, "7칸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홍예가 서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잠자리무사를 붙였다. 거기에 다리 놓을 돌을 깔고 다리 위 바깥쪽에는 장대석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했다. 남수문도 그림과 설명이 화홍문과 같다. 9개의 홍예는 좌우에 각각 사이 돌기둥 8개를 세워서 돌다리를 놓았다고 기록했다.

수원화성 화홍문, 안쪽 모습

수원화성 화홍문, 안쪽 모습


화성성역의궤 기록은 화홍문을 처음 건설할 때는 홍예 수문이 현재의 터널 방식이 아니고 홍예 사이에 4개의 돌기둥을 세웠다는 것이다. 안과 밖의 홍예 사이는 매향석교, 신풍교, 대황교와 같은 돌기둥 방식이고 안과 밖에만 홍예로 된 것이다.

수원부계록에 의하면 1846년 6월 9일 대홍수로 화홍문, 남수문, 매향교가 파괴되었다가 1848년 6월 10일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 기록에는 화홍문의 형태와 어떻게 보수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화홍문의 형태가 돌기둥 방식에서 터널 방식으로 바뀌었다면 이 당시에 바뀐 것인데 화홍문과 남수문을 아예 새로 쌓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공사 규모도 크고 비용도 많이 들었을 것인데 기록에는 없다.

수원화성 화홍문, 밖에서 본 모습

수원화성 화홍문, 밖에서 본 모습


화성성역의궤의 기록대로 돌기둥 방식이었는지 현재의 모습처럼 전체가 홍예터널 방식이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동시대에 세워진 만안교를 통해 화홍문의 원형을 유추할 수는 있다. 현재의 모습이 홍수 등 강한 수압에 구조적으로 안전하고 형태는 아름답게 보인다.

수원화성 화홍문, 만안교, 홍예수문,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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