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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사상과 리더십, 21세기 공동체를 다져간다
김준혁교수의 124회 수원포럼을 통해 공감하는 정조사상
2021-09-06 17:10:18최종 업데이트 : 2021-09-06 17:10:14 작성자 : 시민기자   김청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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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라면 정조처럼' 제 124회 수원포럼, 수원시청 중 회의실


현대를 흔히 리더십(Leadership)의 부재의 시대라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 그럴까를 곰곰하게 생각해 본다. 그 이유를 지난 3일 김준혁 교수의 '리더라면 정조처럼, 21세기 지도자와 공동체의 미래'라는 제목의 124회 수원포럼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강사인 김준혁 교수는 정조대왕에 대해 학문적으로 깊히 연구하는 학자로 수원파장초등학교 출신의 수원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수원에 대한 역사와 함께 애정과 애향심이 남달랐다. 원고없이 이야기 식으로 재미있고 때론 호기심으로 진행된 포럼은 정각 4시 30분에 시작하여 6시에 끝났지만 정조에 대해 세부적으로 더 알기에는 시간이 역시 부족했다.

비대면으로 164명이 참가한 영상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모두가 명 강의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필자 역시 순간순간 정조이야기를 들으며 평소에 미처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접하며 수원시민으로 수원의 태동의 역사적 배경을 속시원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정조대왕의  이력서

정조대왕의 이력서


먼저 정조대왕(1752~1800, 조선22대 국왕)의 이력서가 흥미로웠다. 그의 본명은 이산, 할아버지는 영조, 아버지 사도세자, 어머니 헤경궁 홍씨, 취미는 운동, 그림그리기, 특기는 주몽 빰치는 활솜씨, 업적으로는 규장각, 장용영 설치, 수원화성 등 다수가 있다. 이쯤 되면 표면적으로는 정조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규장각은 왕실 박물관이며 왕실도서관이다. 장용영은 1785년 국왕호위 전담부대를 창설한 것을 말한다.

조선 사회는 문무의 차별이 아주 심했다. 이런 차별은 결국 당파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공동체의 파괴를 보며 정조는 수레의 양바퀴와 새가 날 때 양 날개 짓을 하는 것에 비유하며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정책을 폈다. 더 나가 모든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이미 공정의 의미를 깊이 알고 정책에 반영했으니 얼마나 어진 임금이었던가? 정조 초상을 보며 정조시대의 실학정신을 연상할 수 있었다. 반계수록(磻溪隧錄)은 1769년 유형원의 대표적 서술인데 정조가 이 책을 읽고 크게 감탄하여 관료들 모두가 읽을 것을 권했다. 이 책은 그 만큼 조선후기 사회와 학계에 영향을 끼쳤다.
 
정조는 어진을 네 번 그렸다.

정조는 어진을 네 번 그렸다.

 

정조의 사상은 변즉통(變卽通), 통즉구(通卽久) 즉 '변화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사상이었다. 규모를 세우는 데는 '상하사방 균제방평(上下四方均齊方平)' 여덟 글자가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즉 정조의 군주관을 일컫는 것이다. '사중지공(私中之公)'은 정조가 신임 과거급제자들에게 훈시한 내용으로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일은 하지만 공적인 일을 열심히 하라는 오늘날 공무원이 지켜야 할 덕목 같은 것이다. '손상익하(損上益下)'는 실제로 소민의 보호, 노비 세습제 폐지 등 당시 조선 문화가 혈액이 터질 정도의 곪아진 위험도에 기인하여 보수 사고의 개혁의 방향성을 읽을 수 있다.

정조는 문화의 가치를 중시하되 그 다양성을 강조했다. 지금의 시대정신과 딱 맞아 떨어진다. 예를들어 조선시대의 건국이념이 고려의 불교 대신 유교 장려, 원나라 대신 명나라와 친하기 등 고려와는 다른 이념이긴 한데 당시 승려들이 한양성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불교의 자비나 유교의 인은 일맥상통한다는 정조의 이야기는 지도자가 갖는 소통 등 오늘날 지도자들이 새겨야할 교훈이었다.

정조는 검소하기로도 유명했다. 즉 지도자로서의 경제관념이다. 비단옷은 단 두벌이었고 곤룡포(임금이 입던 정복), 강사포(왕의조복) 등 무명 옷을 즐겨 입은 군주로 하루에 두끼 중 한 끼는 반찬을 5가지 이하로 했다. 양말을 꿰매 신는 군주, 단청(丹靑)도 칠하지 않은 작은 집에 거하는 등 왕 스스로 솔선수범하며 행동으로 근검절약했던 정신은 모두가 배워야 할 리더십이기도 하다.

"경부선이 왜 의왕 쪽으로 나갔는지 아느냐?"라는 갑작스런 강사 스스로의 질문에 많은 참여자들은 궁금증을 자아냈다. 만일 경부선이 지지대 고개와 화성을 관통하게 되면 노송지대 화령정의 혼령을 훼손하게 되기 때문에 당시 130명이 서울 경복궁에 올라가 데모를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고종이 특명을 내려 그렇게 됐다는 놀랄만한 이야기도 곁들였다.

정조의 공직자 개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문무의 차별을 없애는 것이고 공무원의 무임금을 철폐한 일이었다. 전자는 공정의 사회를 만드는 일이었고 후자는 공무원에게 임금을 안 주면 부정부패가 심해질 수 밖에 없어 수원에서는 정조 23년에 월급주는 제도가 처음으로 생겼다고 한다. 당시 수원에는 10만명 안 되는 인구에 공직자는 400명이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정조의 개혁정치에 조선 역사상 최초로 화성행궁 앞에서 모두가 나와 춤을 추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124회 수원포럼에서의 김준혁 교수

제124회 수원포럼에서의 김준혁 교수



1925년 화홍문(북수문) 누각이 대홍수에 떠 내려갔다. 이를 백성들이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8년 동안이나 백성들이 돈을 모아 복원했다. 뿐만 아니라 수원천 역시 순수 백성의 힘으로 복원했다는 점은 수원시민의 위대한 실증사례이기도하다. 이러한 애민사상은 곧 정조의 그 사상이 그대로 시민들에게 속속 배어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정조의 인간에 대한 예의는 '판결문을 볼 때 경전을 대하듯 했고 미천한 마부에게도 이놈 저놈 하지 않았다. 서얼(양반의 후손 가운데 첩의 자손)도 노비도 인간이다. 그리고 훈민정음을 적극 활용할 것을 적극 권장했다' 강사는 마무리를 했지만 시간이 모자라 질문을 할 수 없어 아쉬움이 컸다. 수강을 마치며 정조의 폭넓은 개혁정치가 최근의 답답한 우리나라 현실의 암울함을 변화시키는 촉매제가 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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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반계수록, 검소한 정조, 공정과 소통, 김청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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