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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지산 화성 채석장 제모습 찾아
수원화성 축성에 필요한 성 돌 숙지산에서 가장 많이 조달해
2021-07-19 15:02:49최종 업데이트 : 2021-07-19 15:03:15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숙지산 돌 뜨던 터 중에서 가장 넓은 곳

숙지산 돌 뜨던 터 중에서 가장 넓은 곳



'숙지산 화성 채석장'은 2006년에 수원시 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됐다. 숙지공원에 있는 문화재 안내 간판에는 "숙지산 화성 채석장은 화성을 축조하기 위한 돌 캐기가 이루어졌던 유적으로 팔달산과 함께 중요한 석재 공급원이었던 곳이다. 화서 전철역 부근 KT&G 경기지역본부(현 푸르지오 아파트)의 건너편 숙지산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서 길닦이를 통해 수레를 이용하여 화성 축성 장소까지 성 돌을 운반하였다. 채석 당시의 쐐기 자국이 여러 곳에 남아있어 수원화성 축성 이해에 있어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적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숙지산 돌 뜨던 터 중에서 가장 넓은 곳, 주변이 말끔히 정리돼 유적지로서 본 모습을 찾았다.

숙지산 돌 뜨던 터 중에서 가장 넓은 곳, 주변이 말끔히 정리돼 유적지로서 본 모습을 찾았다

 

숙지산에는 돌 뜨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있고 쐐기 자국이 선명하다. 화서다산도서관 뒤 작은 언덕을 넘어가면 숙지산에서 가장 넓은 돌 뜨던 현장이 있다. 언덕에서 왼쪽으로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가면 곳곳에 돌 뜨던 터를 볼 수 있고 영복여고 방향의 산에도 돌 뜨던 터가 있다.

그동안 푸르지오 아파트 맞은편에 있던 돌 뜨던 터는 접근할 수 없었는데 최근에 주변을 정리해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문화재 안내 간판이 숙지공원에 있는 것도 좋지만, 돌을 가장 많이 뜬 가장 넓은 현장에 설치하면 좋을 것 같다. 현재 돌 뜨던 터를 답사하려고 해도 문화재 안내 간판 설명을 읽고는 돌 뜨던 터를 찾기 힘들다. 돌 뜨던 터를 아는 사람과 가야만 현장을 답사할 수 있다. 현장 지도와 사진을 삽입해 돌 뜨던 터의 자세한 위치를 표시하면 좋을 것 같다.

 

다산도서관 뒤에서 푸르지오 아파트 방향으로 가는 길도 새로 포장하고 가로등도 달았다.

다산도서관 뒤에서 푸르지오 아파트 방향으로 가는 길도 새로 포장하고 가로등도 달았다



수원화성 축성에 사용한 가장 큰 돌은 4대문 홍예문 하단에 사용한 선단석 이다. 크기가 길이 5척 2촌(160cm), 너비 4척 1촌(126cm), 높이 4척(123cm)의 직육면체로 무게는 약 6.8톤에 이른다. 33덩이를 떠서 32덩이를 사용했다. 기록이 없어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선단석 같이 큰 돌은 거중기를 사용해야만 들을 수 있는 돌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큰 돌 1개의 무게가 12,000근이며 30명이 거중기를 이용해 들을 수 있다고 했는데 한 사람이 400근의 무게를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경국대전에 1근은 약 642g이니 한 사람이 약 257kg을 들을 수 있다는 얘기다.

기록에 의하면 거중기는 1대만 제작했다고 했는데 거중기를 설치하고 돌을 들어 올려 대거, 평거, 유형거 등에 돌을 실으려면 넓은 터가 필요하고 여러 조건에 합당한 곳은 길가에 있는 푸르지오 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채석장뿐이다. 근처에 아파트 단지도 들어서고 유동인구가 많아 수원화성과 연계해 역사문화 교육적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숙지산 돌 뜨던 터

숙지산 돌 뜨던 터


수원화성 축성에 필요한 성 돌은 숙지산에서 가장 많이 조달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숙지산에서 81,100여 덩어리, 여기산에서 62,400여 덩어리, 권동에서 30,200여 덩어리, 팔달산에서 13,900여 덩어리 등 총 187,600여 덩어리의 돌을 떴다고 기록했다. 숙지산 돌은 강하면서도 결이 가늘고, 여기산 돌은 부드러우면서도 결은 거칠었다. 권동의 돌은 여기산과 같았으나 결이 조금 더 가늘었고 팔달산의 돌은 숙지산에 비하면 더 강하고 여기산 보다는 더 거칠었다.

여기산 돌 뜨던 터

여기산 돌 뜨던 터



1796년 1월 24일 수원을 방문한 정조대왕은 "하늘로부터 도움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도다. 그래서 면(面) 이름을 공석(空石)이라 하고 산의 칭호를 숙지(孰知)라 했으니, 예로부터 돌이 없는 땅이라고 일컬어 왔는데 오늘날 홀연히 셀 수 없이 돌이 나와 축성의 재료가 되게 하여 돌이 없게 될 것을 누가 미리 알고 그런 이름을 붙였던가. 이는 아득한 예전에 미리 정해 놓은 바가 있었음이 그 얼마나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화성성역의궤 부편 2 연설 편에 기록되어있다. 숙지산(孰知山)은 공석면(空石面)에 있었다.

수원화성 돌 뜨던 터는 수원화성 축성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유적이다.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에 흩어져있는 유적을 통합해 관리하고 수원화성과 연계해 역사문화 콘텐츠로 활용하면 관광자원으로도 좋을 것이며 문화유적 인프라 확대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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