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동북공심돈에서 바라본 수원화성, 아름답고 아름다워
(사)화성연구회 수원화성 모니터링 활동
2024-02-08 11:34:09최종 업데이트 : 2024-02-08 11:34:03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화성 동북공심돈

수원화성 동북공심돈


2월 7일 오후, 다소 쌀쌀한 날씨에 (사)화성연구회 모니터링 위원회에서 수원화성 모니터링 활동을 했다. 이번 모니터링은 동북공심돈, 동북노대, 창룡문, 동1포루, 동1치, 동포루, 동2치, 봉돈, 동2포루, 동3치, 동남각루를 살펴봤다. 특히 평상시에는 닫혀 있는 동북공심돈, 동포루, 봉돈 내부를 둘러봤다. 화성사업소의 협조를 얻어 시설물 내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모니터링 활동은 수원화성 시설물의 현재 상태를 꼼꼼하게 관찰해 사진과 글로 기록을 남긴다. 매월 모니터링 활동을 하기 때문에 시설물의 보존상태를 지속해서 확인할 수 있다. 보수가 필요한 곳, 균열이 진행되는 곳 등이 관찰되면 시정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수원화성 동북공심돈에서 바라본 수원화성

수원화성 동북공심돈에서 바라본 수원화성

 
성벽의 지반은 안정되어 있는지, 성벽이 기울어지거나 여장, 미석, 옥개석 등이 파손된 곳이 있는지, 성벽 틈에 식물이 자라거나 이물질이 있는지, 암석표면이 변색 되거나 떨어져 나간 곳이 있는지, 목조건물 기단 및 기둥이 갈라지거나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는지, 충해 및 조류의 피해가 있는지, 지붕의 기와, 치미, 용두, 잡상 등에 균열이 있거나 파손된 곳이 있는지, 소화기의 위치와 관리 상태는 적절한지, 성벽 내외의 수목이 경관을 해치거나 성곽을 훼손하는지, 토사 유출이 진행되거나 성곽이 훼손되는지, 안전시설이 적절한지 등을 꼼꼼하게 모니터링을 한다.
수원화성 동북공심돈 내부

수원화성 동북공심돈 내부

 
동북공심돈은 지난해 2월 4일 내부 모니터링을 한 이후 1년 만에 다시 내부를 관찰했다. 외벽 군데군데 세로로 균열 현상이 관찰되었고 화성사업소에서도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 내부는 벽돌의 표면이 들뜨거나 떨어지는 현상이 지난해보다 심해졌다. 총안 곳곳에도 떨어져 나온 벽돌 조각이 있어 외부로 낙석의 위험도 보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돌이나 벽돌의 표면이 부식되거나 작은 조각으로 떨어져 나간다. 봄철에는 시설물 붕괴 등 안전사고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수원화성 축성 당시 3개의 공심돈을 지었다. 1795년 10월에 남공심돈을 세웠는데 옛 법에 의거해 처음으로 창설하였다. 1796년 3월에는 남공심돈과 같은 제도로 더 크게 서북공심돈을 세웠다. 7월에는 동북공심돈을 세웠는데 중국의 요동과 계주 사이의 들 가운데 있는 평돈을 조금 모방하여 벽돌로 둥그렇게 세웠다.
수원화성 동북공심돈 내부

수원화성 동북공심돈 내부

 
1797년 1월 29일 수원화성을 방문한 정조대왕은 서북공심돈 앞에서 "공심돈의 제양은 곧 우리 동방에 처음 있는 것이다"라고 했지만, 동북공심돈에 대해서는 "중요하지 않은 곳에 힘을 들인 것이다. 초루와 돈대 등은 때때로 기교를 부렸으니 이는 나의 본뜻과 크게 다르도다"라고 말해 공심돈에 대한 심경을 밝혔다.

한글 정리의궤 기록에 의하면 동북공심돈의 축조에는 특별한 철학적 원리가 들어가 있다. 서북공심돈은 모지고 동북공심돈이 둥근 것은 천지(天地)의 방원(方圓)을 본받음과 같고, 동북공심돈 위로 올라가는데 가장자리로 두 번 돌아 가운데 뿌리가 서 있음은 태극(太極)의 동정(動靜)을 형상함과 같다. 위의 누각을 2칸으로 만든 것은 일월(日月)을 응한 듯하고, 총안을 돌아가며 뚫은 것은 모든 별이 북극성을 향하여 모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수원화성 동포루 내부

수원화성 동포루 내부

 
동북노대 성가퀴는 화성성역의궤 기록 및 그림과는 다르게 복원했다. 원래 둥근 여장을 삼면에 각각 가운데에 한 첩씩 만들고 네 모서리에 또 한 첩씩 꺾어 세우고, 매 첩의 사이에 요철형(凸)의 여장을 각각 하나씩 틈틈이 끼웠다고 했는데, 둥근 여장을 평여장으로 복원했다.

창룡문, 동1포루, 동1치를 지나 동포루 내부에 들어갔다. 포루 안에서 성 밖을 바라보니 좌우로 성곽 시설물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다. 안전상 아래층으로 내려가지는 않고 봉돈으로 향했다. 
수원화성 동포루 내부에서 바라본 동1치

수원화성 동포루 내부에서 바라본 동1치


수원화성 봉돈은 그림과 기록이 남아있어 조선시대의 어떤 봉수대 보다도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이지만 조선시대 봉수대 복원의 전형이 되었다. 

조선시대 봉수 제도는 1895년까지 500여 년간 5개의 노선이 유지되었다. 3개는 함경도, 평안도에서 서울 목멱산으로, 2개는 부산 동래 다대포와 전라도 순천에서 서울 목멱산으로 집결하는 노선이었다. 수원화성에 봉돈이 생기면서 남쪽에서 올라오는 2개 노선의 봉수 신호를 받았다. 
수원화성 봉돈

수원화성 봉돈

 
부산 동래 다대포에서 서울 목멱산(남산)으로 올라가던 노선이 제2로인데 용인 석성산의 신호를 받았고, 전라도 순천에서 서울 목멱산으로 올라가던 노선이 제5로인데 흥천대 봉수의 신호를 서봉산 간봉(1821년 이후에는 건달산 봉수)을 통해 받았다. 조선시대 봉수의 전달 속도는 시속 100km 정도로 추정된다. 평상시에는 지방에서 출발한 봉화 신호가 해가 질 무렵이면 목멱산 봉수대에 도착해 남쪽 화구 한 곳에서만 횃불이 타올랐다. 오늘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었다는 신호였다.
수원화성 봉돈 내부

수원화성 봉돈 내부


모니터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수원화성의 정체성을 공부하고 보존에 일조한다는 회원들의 자부심이 활동의 동력이다. 
한정규님의 네임카드

연관 뉴스


추천 5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독자의견전체 0

SNS 로그인 후,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icon 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