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상상력을 더해 만나는 7박 8일의 축제
화성박물관에서 1795년 정조의 수원 화성 원행 자료를 보며
2024-02-13 15:32:33최종 업데이트 : 2024-02-13 15:32:28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혜경궁 홍씨 가마 자궁가교. 먼 길을 가므로 특별해 제작했을 것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 디지털 영상.

혜경궁 홍씨 가마 자궁가교. 먼 길을 가므로 특별해 제작했을 것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 디지털 영상.


  화성박물관 2층에는 화성문화실이 있다. 여기에서 1795년 을묘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수원을 방문해 백성과 함께한 7박 8일의 축제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행차 일정이 《화성행행도》와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담겨 있다. 박물관은 이 자료를 토대로 상시 전시를 하고 있다. 

  《화성행행도》 8폭 그림은 크기부터 압도적이다. 화성에서의 성묘 참배, 화성행궁 정당인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 회갑 기념 진찬례, 노인 등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사실적인 모습에 색감도 그대로 살아 있어 마치 카메라로 찍은 듯하다. 보고 있으면 그때 장면이 생생하게 연상된다. 

왕 가마 정가교와 호위군관 등의 모습. 디지털 영상에서 행렬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이 보이고, 악대의 음악이 나와 당시 현장에서 눈으로 직접 보는 느낌이 있다.

왕 가마 정가교와 호위군관 등의 모습. 디지털 영상에서 행렬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이 보이고, 악대의 음악이 나와 당시 현장에서 눈으로 직접 보는 느낌이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디지털 영상으로 옮겨 놓은 것도 만날 수 있다. 왕 가마 정가교와 혜경궁 홍씨 가마 자궁가교 등 을묘년 행차 때 대신과 군사들 모습까지 파노라마 영상으로 재현된다. 행렬의 화려한 모습에 웅장한 음악이 함께 어우러져 당시 현장에서 눈으로 직접 보는 느낌이 있다. 

 박물관 전시장에는 을묘년 수원 행차를 조선 시대 최대의 국왕 행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시 자료에서도 짐작이 간다. 유물은 보는 동안 사실적인 설명은 도움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상상력과 통찰력을 발휘해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을 이해는 능력이 있다. 따라서 그저 감상하는 자세를 넘어 상상력을 통해 국가유산을 만난다면 과거의 시간을 풍요롭게 이해하는 여행이 된다. 

수원 행차 다섯째 날 혜경궁 홍시 회갑 연회. 춤과 노래 그리고 음식이 풍성했다. 이 행사는 수원 백성에게 음식과 의복, 춤 등 문화적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상상해 볼 수 있다.

수원 행차 다섯째 날 혜경궁 홍시 회갑 연회. 춤과 노래 그리고 음식이 풍성했다. 이 행사는 수원 백성에게 음식과 의복, 춤 등 문화적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상상해 볼 수 있다.


 1795년은 정조가 즉위한 지 20년째가 되는 해다. 혜경궁 홍씨 회갑년이다. 아버지 사도세자도 어머니와 동갑이었으니 살아계셨다면 회갑 축하연을 성대히 할 수 있는 특별한 해였을 것이다. 정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2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다. 궁궐을 비우면 역모의 위험도 있을 수 있다. 왕실 여성 가족과 대신 등 6천 3백여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가는 것이 쉽지 않다. 현륭원에 가는 원행(園幸)이었지만, 한양에서 수원까지 원행(遠行)이다. 준비 기간 엄청난 무게감이 짓눌렀을 것이다.

 '어머니는 고령(당시 회갑은 드문 나이)으로 먼 길을 간다면 힘은 안 드실까. 이동 중에 불상사는 없을까. 따뜻한 봄날(행차 기록은 윤2월 9일∼16일, 이는 음력이다. 양력으로는 3월 29일∼4월 5일)이지만 비는 안 올까(실제로 둘째 날 새벽 시흥 행궁을 출발할 때 비가 왔다.).'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화성행행도》 8폭 그림 중에 '서장대야조도'. 포 발사 등으로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들렸겠지만, 하늘을 수 놓은 별빛은 불꽃놀이처럼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화성행행도》 8폭 그림 중에 '서장대야조도'. 포 발사 등으로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들렸겠지만, 하늘을 수 놓은 별빛은 불꽃놀이처럼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걱정도 있었지만, 당시 행렬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축제였다. 혜경궁 홍씨는 임오화변(1762년) 후 남편 사도세자를 33년 만에 만나러 가는 길이다.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고종 때 모두 공주로 추증)도 어린 나이에 봤던 아버지를 찾아 나선 길이다. 정조 역시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위로의 의식을 하고 싶었다. 

화성행궁 신풍루에서 생활이 어려운 화성주민에게 쌀을 나눠주었다. 왕실과 백성이 함께하는 축제였다.

화성행궁 신풍루에서 생활이 어려운 화성주민에게 쌀을 나눠주었다. 왕실과 백성이 함께하는 축제였다.


  당시는 먼 길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대다. 왕실 가족 등 여성은 궁궐 밖 외출이 쉽지 않았다. 궁궐에서 일하는 여관 등도 임무 수행을 가지만 마음속에는 바깥세상 궁금증이 가득했을 것이다. 백성들의 모습도 보고, 봄빛 가득한 들판의 풍경도 즐긴다. 먼 길에 발길은 무겁지만, 생전에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은 가볍다. 

  백성들은 어때했을까. 임금의 행렬을 보기 위해 백성들은 길마다 늘어섰다. 가까이서 임금을 볼 기회다. 임금님이 지나는 행렬을 보기 위해 먼 지역에서도 찾아왔다. 정조는 화성행행 중 군복인 융복을 입었다. 그러나 그 복장은 알 수 없다. 현재 화령전에 있는 군복 입은 정조 어진은 철종의 군복 차림을 참조하여 그린 것이다. 임금의 군복은 달랐을 것이다. 용 그림이 있고, 금빛 찬란하지 않았을까. 봄날 햇빛에 어울려 더 빛났을 것이다. 

화성행행 중 황금 갑옷을 입은 정조 모습. 화성에 입성하기 전에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 갑옷을 입었다. 봄날 햇빛에 어울려 더 빛났을 것이다.

화성행행 중 황금 갑옷을 입은 정조 모습. 화성에 입성하기 전에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 갑옷을 입었다. 봄날 햇빛에 어울려 더 빛났을 것이다.


  당시 모습을 상상하면, 백관들은 관복을 입고, 장수와 별장 등은 전립과 전복을 착용했다. 호위군관 등은 검과 활과 화살을 차고서 위풍도 당당하다. 마군과 보군 등이 대열을 유지하며 질서 정연하게 행진한다. 꿩과 황새에서 뽑은 깃발은 너울거리고, 금빛 창과 옥빛 도끼는 햇빛에 더욱 빛난다. 나팔 소리는 웅장해 질서 정연한 군사들의 엄숙하고 장엄한 발길을 따른다. 

  《화성행행도》 8폭 그림 중에 '서장대야조도'가 있다. 행차 나흘째인 2월 12일 정조가 팔달산 서장대에 올라 야간 군사훈련을 지휘한 그림이다. 군사훈련에는 3,700여 명의 군사와 400여 필의 말이 동원되어 삼경(23시~1시)까지 진행되었다고 전한다. 

을묘년 원행 때는 시흥 길을 새로 개척했다.

을묘년 원행 때는 시흥 길을 새로 개척했다.


  이 기록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홍용환(1734~1809)이 남긴 '화성행행일기'다. 그는 정조 외조부 홍봉한의 동생으로 혜경궁 홍씨 회갑연에 외빈으로 참석 동행했다. 그가 남긴 시문집 『장주집』 기행문에 "임금께서 화성행궁으로 돌아오신 후에, 서쪽 산의 장대에 올랐는데, 높이가 몇천 장이나 되어 여러 산이 바라다보였다. 이곳만큼 높은 곳이 없으니 한 고을의 진산이었다.

밤에 장대 위에서 횃불을 설치하고 화포를 한 발 쏘니 그 소리가 온 성의 지축을 흔들었다. 불빛과 수많은 횃불이 동시에 환하게 타올랐으니, 진실로 불야성이었다. 잠시 후에 불꽃이 모두 꺼지고 이어 신기전을 발사했는데 불꽃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 떨어지는 것이 마치 수많은 별빛과도 같았다."라고 적고 있다.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들렸겠지만, 하늘을 수 놓은 별빛은 불꽃놀이처럼 아름답게 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화성행행도》 8폭 그림. 크기부터 압도적이다. 사실적인 모습에 색감도 그대로 살아 있어 마치 카메라로 찍은 듯하다. 보고 있으면 그때 장면이 생생하게 연상된다.

《화성행행도》 8폭 그림. 크기부터 압도적이다. 사실적인 모습에 색감도 그대로 살아 있어 마치 카메라로 찍은 듯하다. 보고 있으면 그때 장면이 생생하게 연상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상상하면 더 많이 볼 수 있다. 상상력은 신기루가 아니라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호기심이다. 호기심의 고리를 따라가면 다양한 상황을 발견한다. 선조들은 기억에 남는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듯 그림과 기록으로 남겼다. 여기에 담지 못한 것은 우리의 몫이다. 남기지 기지 못한 당시 모습은 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상상력이 국가유산을 풍요롭게 이해하는 힘이 된다. 
윤재열님의 네임카드

정조, 을묘년, 수원행행, 현륭원, 혜경궁 홍씨, 신풍루, 화성, 윤재열

연관 뉴스


추천 1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독자의견전체 0

SNS 로그인 후,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icon 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