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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독립운동 및 근대 교육 등 격동기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수원 종로교회 역사관을 찾아서
2024-02-16 15:46:30최종 업데이트 : 2024-02-16 15:46:53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교회 앞 기념물. 돌은 1926년 기념관 댓돌이다. 글에는 목회자와 성도 가운데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간 애국지사 임면수, 김세환, 이선경을 소개하고 있다.

교회 앞 기념물. 돌은 1926년 기념관 댓돌이다. 글에는 목회자와 성도 가운데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간 애국지사 임면수, 김세환, 이선경을 소개하고 있다.


 한양성 안에 종각이 있듯 수원화성 행궁 앞에도 여민락이 있다. 그리고 도로 이름도 '종로'로 똑같다. 행궁 앞 종로는 십자 모양의 길이 있다. 과거 이곳은 수원군청이 자리했던 곳이다. 지금도 수원 중심이다.

 이런 곳에 수원종로교회가 있다. 붉은 벽돌에 벽면 유리 벽화 모양 창이 고풍스럽다. 지붕에 십자가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는 건물은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인다. 큰 건물이 위세가 있어 보이지만 문 앞에 서면 친근함이 든다. 역사관 방문을 환영한다는 안내판 때문이다. 종교 시설은 엄숙해야 하므로 불편하지는 않을까. 몇 번 고민하다가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방문했다. 

역사관 내부. 의미 있는 교회 역사를 정성스럽게 기록 보존하고 있다.

역사관 내부. 의미 있는 교회 역사를 정성스럽게 기록 보존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사관이 깨끗하다. 1894년 때부터 기록이 시간을 뛰어넘어 살아있다. 올해로 130년의 역사를 이어온 것이다. 김순례(권사) 사무 간사는 "역사관은 개관한 지 2년 정도 됐다. 교육관을 새로 짓고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곳을 이렇게 만들었다. 여기 유물은 우리나라 개신교 역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교회 역사뿐만 아니라 수원 독립운동사와 근대교육의 출발점을 알 수 있는 역사관이다."라고 소개한다. 

 역사관 기록에 의하면 1893년 8월에 스크랜튼 선교사가 수원에 내려오고 세례를 베풀었다. 1894년 이하영이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이후 스크랜튼과 이경숙은 수원성 내에서 성경반을 만들어 가르쳤다. 이때는 갑오개혁이 있던 시기로 조선의 전통적 체제와 서양의 새로운 사상이 충돌하던 시기다. 수원도 교회가 들어오면서 봉건적 이념을 건너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 개신교 역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우리나라 개신교 역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새로운 상황은 순탄하지 않았다. 1901년 9월에 김동현 전도사를 수원에 보내 화령전 앞 언덕에 교회 터를 구매하였으나 전도사가 구속된다. 10월에 인천 내리교회 이명숙 권사가 수원에 와 보시동 초가집에서 선교사역을 한다. 일제 강점기에 박해와 시련을 견디며 사람들이 모이고 교회는 점차 커져서 현재 종로 네거리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천주교도들이 병인교난에 피 흘린 순교 장소다. 종로교회도 격동의 시대에 수난을 겪고 역사를 이어 왔다는 점에서 장소가 주는 의미가 있다. 

1902년 6월 스크랜튼 선교사의 헌신으로 여자 매일학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가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로 성장했다.

1902년 6월 스크랜튼 선교사의 헌신으로 여자 매일학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가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로 성장했다.


 종로교회는 수원성 내 최초의 개신교회로 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교회 내에서 지식인으로 성장한 인재들이 민족의식을 나누고, 독립운동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 출입구에는 목회자와 성도 가운데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간 애국지사를 소개하고 있다. 임면수, 김세환, 이선경이다. 

임면수 권사는 신앙인이며 교육자고 독립투사였다. 이하영 목사는 민족계몽운동가로 삼일학교를 발전시켰다.

임면수 권사는 신앙인이며 교육자고 독립투사였다. 이하영 목사는 민족계몽운동가로 삼일학교를 발전시켰다.


  임면수는 권사로 신실한 신앙인이며 교육자이자 독립투사였다. 신흥무관학교 분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했다. 김세환도 교회를 출입하면서 신앙생활과 함께 독립운동의 꿈을 키웠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48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선경은 교회 교사였다. 서울 숙명여학교에 진학 후 학생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구국민단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병을 얻어 재판정에도 나올 수 없었다. 일제의 폭력적 고문 때문이었다. 구류 8개월 만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으나 세상과 이별했다. 19살의 나이에 겨레의 꽃이 됐다.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 정문. 근대 여성 교육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삼일여학교 터다. 이 학교에서 김세환 선생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교육했다.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 정문. 근대 여성 교육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삼일여학교 터다. 이 학교에서 김세환 선생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교육했다.


  서양에서 들어온 교회는 근대교육으로 우리나라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종료 교회도 마찬가지다. 1902년 4월 이하영 임면수 등이 베크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교회 안에 남자 매일학교(현 삼일학교)를 세웠다. 교장을 역임한 후 매향동 집과 과수원 2,000여 평을 학교에 희사하기도 했다. 이하영 목사는 1902년 학교 개설 당시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이 됐다. 나중석은 매향동 밭 900평을 삼일학교 운동장으로 사용하도록 희사했다. 6월에는 스크랜튼 선교사의 헌신으로 여자 매일학교(현 매향학교)를 시작했다. 김세환은 이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두 학교는 삼일학교와 삼일여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성장했다. 수원에 최초로 세워진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인재 양성의 산실이었다. 

삼일고등학교 내 필동관. 임면수 선생의 호를 따서 건물 이름을 붙였다.

삼일고등학교 내 필동관. 임면수 선생의 호를 따서 건물 이름을 붙였다중앙에 뾰족지붕 모양 건물에 종로 예배당(현 수원종로교회)이라고 쓰여 있다. 수원천 건너에는 삼일학교와 삼일여학교 건물이 보인다(관광의 고도 수원 지도. 화성박물관 제공).중앙에 뾰족지붕 모양 건물에 종로 예배당(현 수원종로교회)이라고 쓰여 있다. 수원천 건너에는 삼일학교와 삼일여학교 건물이 보인다(관광의 고도 수원 지도. 화성박물관 제공)


 역사는 시간이 흐르면 온전하게 기억되지 않는다. 이렇게 의미 있는 내용을 정성스럽게 기록해야 역사가 되고, 현재와 미래에 거울이 된다. 종로교회 역사관은 우리나라 교회사와 근대사가 있다. 당시 교회는 선교만이 아니라 신식 교육을 했고, 독립운동을 했다. 여성 교육을 한 것도 중요한 역사적 전환이다. 인재 양성을 위해 개인재산을 털어 지원한 사람들의 기록도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어려운 시대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뜨겁게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이다. 오늘날 풍요로운 시대에도 그들이 남긴 정신이 숭고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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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근대교육, 삼일학교, 독립운동, 임면수, 이하영, 김세환,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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