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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문명충돌의 현장, 터키 이스탄불
소피아 사원이여 영원하라...
2009-01-22 15:18:30최종 업데이트 : 2009-01-22 15:18:30 작성자 : 시민기자   권오기

동과 서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곳인 이스탄불은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가 합쳐져 가장 부드러운 조화를 창조해 내는 세계적인 도시이다. 이스탄불이 세계적인 국제도시로 발달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도시의 지정학적인 위치로 북위 48도 경도 28도에 위치한 이스탄불은 세계에서 두 개의 대륙을 연결하는 유일한 도시여서 예로부터 이스탄불을 차지하려는 세력들의 각축장이 돼 왔다.과거의 수많은 유물과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 남아 있는 건 물론, 이스탄불은 도시 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할 수있다.  

[여행]문명충돌의 현장, 터키 이스탄불_2
동서양을 잇는 보스 포러스교

한국인이 터키란 나라를 알게 되는 것은 터키가 한국전에 참전한 UN 16개 국의 하나라는 것, 중학교 때 국어 시간에 한국어가 우랄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데 여기에는 몽고어와 터어키어가 들어간다고 배워서, 세계사 수업 시간에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가 한편이 되어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싸웠다는 사실 등을 통해서이다. 현재 터키 공화국은 유럽 발칸 반도의 극히 일부와 소아시아를 영토로 하고 있으며 면적은 약 78만 평방 킬로미터로 남한의 8배 크기이다. 한국은 아시아의 동쪽 끝에 터어키는 아시아의 서쪽 끝에 있다.  
 
역사적으로는 흉노의 동쪽에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었으며 한나라의 무제가 고조선을 침공한 이유 중의 하나가 고조선이 흉노와 동맹을 맺는 것을 두려워 한 때문이었다. 6세기 중엽에 일어난 돌궐은 고구려와 수십년 간 상쟁하였으나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수 양제는 607년 돌궐을 방문했다가 고구려 사신이 와 있는 것을 보고 고구려 침략을 결심하였다. 동돌궐이 630년 멸망하자 고구려는 단독으로 당과 상대해야 했다. 고구려 유민이 699년 무렵 발해 건국에 성공한 것도 683년 부활한 돌궐이 끊임없이 당을 침략하여 당이 만주 지배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큰 이유이다.
 
터키는 나라 이름이고 투르크는 종족을 지칭한다. 그러나 터키 족과 투르크 족이라 할 때에는 종족의 기원 상 동일하나, 일반적으로 현재 터키 공화국이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소 아시아)에 정착한 종족을 터키 족, 중앙 아시아에 거주했던 종족을 투르크 족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중앙 아시아 터키 족을 통칭하는 투르크 족들은 알타이 산맥의 동남부 지역을 근거로 B.C. 2000년 무렵부터 아시아 대륙의 동북부 초원 지대에서 활동해 왔다. 
역사 시대 이래 투르크 족은 중국 문헌에 흉노, 돌궐, 위구르로 나타났으며 오늘날에는 터키 공화국 이외에 중국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의 주요 주민이다.

이스탄불은 도시를 건설한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비잔티움은 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의 통치기간 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재명명되기도 했다. 비잔틴과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에 지도자들은 가장 위대한 종교 건물과 일반 건물들을 세웠으며, 그들의 도시를 유명한 건축가들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로 치장했다.이스탄불은 전체 면적이 7500평방 킬로미터이며, 길이가 150킬로미터 넓이가 50킬로미터이며 인구는 1500만에서 1800만으로 추정되고 있다. 

도시는 유럽쪽에 있는 두 부분, 즉 골든 혼의 남쪽에 있는 역사적인 반도 구시가지와 북쪽의 갈라타 지역과 아시아 지역이 있다. 유럽 지역은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이며 반면 아시아 지역은 거주 지역이다. 이스탄불은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잇고 유럽과 아시아를 양분하는 보스포러스의 양쪽에 건설되었다. 길이 7킬로미터의 길고 좁은 만인 골든 혼은 유럽지역을 두 부분으로 양분한다. 

이스탄불의 건립과 관련된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BC650년경 에게해의 해양부족은 비자스(Byzas)의 지휘 아래 고대 그리스의 번성했던 도시 메가라(Megara)를 떠나서 새로운 땅을 찾고 있었다. 그 시대의 풍습에 따라 비자스는 델피(Delphi)의 아폴로 신전에서 '눈먼 자들의 땅(Land of Blind) 건너편'에 정착하라는 신탁을 받았다. 이주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그 땅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지금의 이스탄불을 발견하게 됐고, 기름진 땅과 천혜의 항구 골든 혼(Golden Horn)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당시 그들이 정착한 땅의 반대편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주자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땅을 놔두고 반대쪽에 정착한 사람들은 눈먼 자들이 틀림없다고 생각해 예언이 말했던 그 땅을 찾았다고 확신했다. 도시는 비자스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부르게 됐다. 아직까지도 골든 혼과 아시아 쪽에서는 BC3000년경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기원전 680년전 아시아 지역의 칼세돈에 도리아 인들이 도시를 세웠고, 메가론의 식민주의자들이 비자스의 지휘하에 이 곳에 왔고, 유럽 지역의 역사적인 반도인 구시가지의 사라이부르누라고 불리는지역에 최초로 도시를 세웠는데 이곳은 아시아 지역의 도리아 인들이 세운 도시 맞은 편이다. 지리학적인 장점과 교역에 편리함으로 거대한 부를 획득하게 되었다. 기원전 513년에 이 도시는 페르시아에 의해 점령당했고, 기원전 407년에는 아테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고대 중국의 한나라를 굴복시켰던 흉노가 투르크 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이다. 흉노는 기원전 3-4세기경 중국의 북방에서 투르크 씨족들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제국이며, 중국의 한 무제에 의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결과 지금의 키르기즈스탄 지역까지 이동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흉노 족은 서투르크족을 재규합하고, 이후 인근의 슬라브족, 고트족 등을 모두 규합하여 유럽인에 의해 '훈'(흉노의 유럽식 발음)이라고 불렀던 대제국을 건설한다. 훈 제국의 확대와 그에 따른 전쟁으로 인해 유럽의 서부에 위치하고 있던 게르만 족의 이동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로마제국으로 대변되던 유럽의 역사는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돌궐 제국은 아시아에서 흉노에 이어 두번째로 스텝을 통일한 제국이며, 돌궐은 터키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최초로'Türk(튀르크)'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돌궐 제국 이후로 투르크인들이 그들의 정체성과 문화 등을 유지하는 데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돌궐의 해체 이후 아랍-이슬람군대의 동방진출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으로 인해 투르크족의 만남이 용이해지면서 투르크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돌궐, 위구르를 거쳐 중앙아시아에서 카라한, 가즈나, 셀주크 등 3개의 이슬람계 투르크 국가들이 경쟁하였고, 이 경쟁에서 승리한 셀주크는 이란 지역과 지중해 지역까지 그 세력권을 확대시켰다. 이후 셀주크의 서진은 계속되어 본무대인 중앙 아시아를 넘어 당시 비잔틴의 세력 하에 있던 아나톨리아로 이동하게 되었다. 1071년의 말라즈기르트에서 드디어 비잔틴의 디오게네스 황제의 군대와 격돌한 셀주크는 이 전쟁을 대승하고, 투르크의 역사는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셀주크의 서진은 계속해서 비잔틴과의 충돌을 가져왔으며, 마침내 유럽에서는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비잔티움은 상업과 무역으로 번성하며 독립적인 도시로 발전했으나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BC512년에 페르시아 제국의 정복에 이어 여러 열강들의 세력 다툼의 중심이 됐다.  도시의 아크로폴리스는 현재 톱카프 궁전이 자리한 곳에 있었으며 성벽은 이곳에서 시작해 마르마라해 연안까지 닿았다.  로마제국은 395년에 둘로 나뉜다. 서로마는 5세기에 멸망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비잔틴제국(동로마)은 이후 1,000년간 번성했다. 5세기 초에는 6,452m에 이르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재건축으로 도시가 더욱 넓어졌으며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통치 아래에서 황금기를 맞이했다. 유명한 아야소피아 성당 역시 이 시기에 지어졌다. 

유럽에서 온 갈라타 인들은 기원전 227년에 아시아 지역에 정착했으며, 기원전 146년에는 도시의 방어를 위해 로마와 군사 동맹이 맺어졌고, 로마 공화정 아래에서는 자유도시였다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69~79) 시기에는 로마의 직접 지배를 받으며 무역의 중심지이자 중요한 항구도시로 발전했다. AD 196년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이곳을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4세기에 로마제국은 그 영역이 점점 더 커지게 됐고, 따라서 수도인 로마(Rome)는 위치상 중앙에 위치하지 않게 됐다. 

[여행]문명충돌의 현장, 터키 이스탄불_3
문명충돌의 치열한 전쟁터 이스탄불 성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는 바다와 육지가 교차하고 완벽한 날씨를 가진 전략적 위치에 있는 비잔티움을 새로운 수도로 택해 새로운 성벽을 건축하고 도시를 확장했다. 많은 사원과 정부, 궁전, 목욕탕, 히포드롬이 지어졌고 비잔티움은 330년에 마침내 공식적인 로마 수도로 선포됐다. 초기에 도시는 Second Rome, New Rome 등으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불리게 됐다. 이 시기에 도시는 그리스도교 도시로 포고됐으며, 그리스도교의 종교 중심지가 돼 새로운 길과 건축물, 기념탑이 건축됐으며 많은 교회들이 지어졌다. 

AD395년 테오도시우스2세 황제가 죽음으로써 로마 제국은 분열되어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또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5세기 초에 축조되었다. 성경에 단니엘서 2장 7장 등등의 예언과도 같이 서로마 제국이 AD476년에 멸망했을지라도 동로마 제국의 1,000년간 번성했다.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통치 때인 AD527-565년 사이에 많은 새로운 건물들 특히 성소피아가 가장 대표적이다. 비잔틴제국과 콘스탄티노플 후기시대는 궁전과 교회의 음모가 넘쳤으며 페르시아와 아랍의 공격도 잦았다. 이런 혼란을 틈 타 내부 황족간의 싸움도 끊이질 않아 왕좌가 자주 교체되며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726~842년 사이에는 역대 황제들의 성상 파괴운동으로 모든 종류의 종교적인 이미지가 제한됐으며 그림과 조각상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성상문제로부터 붉거진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간의 계속되는 불화로 두 교파는 결국AD1054년에 완전히 분리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 정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1096년에 첫 번째 십자군들이 도시에 전혀 피해를 주지 않고 통과해 갔다. 11세기와 12세기에는 제노아 인들과 베네치아 인들이 갈라타 지역에서의 교역을 장악했다. 1204년에 제 4차 십자군들이 이 도시를 점령하여 약탈한 후, 1261년 비잔틴 제국의 팔레올로고스 왕조에 의해 재탈환 당할 때까지 이 도시를 다스렸다.

라틴세계의 침입은 콘스탄티노플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다. 4차 십자군 원정 때 시작된 침입으로 많은 교회와 수도원, 기념탑이 약탈당했고, 로마 카톨릭의 지배를 받았다. 비잔틴은 1261년에 다시 도시 통치권을 회복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예전처럼 번영하지 못했다. 1390년 베야즈트 1세에 의해 1422년에는 무라트 2세에 의해 도시가 포위당하기도 했다. 마침 이 시기에 확장하던 오스만 정권의 위협은 극에 달해 대구경 대포를 앞세운 메흐멧2세(Mehmed II)에 의해 1453년 53일간의 포위 끝에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당시 21살이었던 메흐멧2세는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다른 지역에서 이주자들을 데려왔으며, 이전 거주자에게도 사회적인 권리를 주는 등 인구를 증가시켰다. 이주자들에게는 숭배의 자유를 보장해 불만의 소리를 없앴는데 그리스 정교 관저가 오늘날에도 이스탄불에 남아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구가 늘면서 황폐화된 도시는 빠르게 재건축됐다. 여러 교회들이 모스크로 개조되는 등 이스탄불은 짧은 시기에 완전히 재건축됐으며, 1세기 후에 터키식 문화와 예술은 온 도시에 퍼지고 돔과 모스크의 첨탑인 미나레(minaret)가 하늘을 뒤덮었다.  

1,2차에 걸쳐 이루어진 십자군 전쟁에서 셀주크는 계속해서 승리하였고, 비잔틴은 아나톨리아에서의 세력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잇단 전쟁 속에서 셀주크는 내부 분열이 시작되고 있었고, 비잔틴과의 전쟁에 치중하면서 동쪽의 몽골에 소홀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셀주크 제국은 몽골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셀주크가 아나톨리아에서 그 지배력을 상실한 후, 아나톨리아 지역에는 아나톨리아 셀주크, 일한(Ilhan)국, 비잔틴, 트라브존 로마국 등의 국가가 등장하였으나,아나톨리아 셀주크의 약화로 이 지역에서 투르크계 국가는 12개나 등장하게 되었다.

[여행]문명충돌의 현장, 터키 이스탄불_1
인류의 문화유산 성소피아 사원

오스만은 터키계 부족국가 중 하나로, 일치감치 다른 투르크 국가들과의 경쟁을 회피하고 성전(지하드)의 원칙을 천명하여 그 대립각을 비잔틴에 맞추었다. 오스만은 우선 부르사를 수도로 하여 에디르네와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으로 그 영토를 확장하며 끊임없이 허약해진 비잔틴을 위협하였고, 마침내 1453년 오스만의 메흐메트 2세는 비잔틴의 수도이자 마지막 영토인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함락시킴으로 비잔틴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금 했다. (이 사건으로 메흐메트 2세는 Fatih(정복자)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16세기 오토만 술탄이 이슬람 정권연합회를 인수했을 때 이스탄불은 이슬람세계의 중심이 됐다. 도시는 완전히 재건축됐고 놀랄 만큼 고급스러워졌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이후 오스만은 영토 확장에 박차를 가하여 그 영토가 가장 넓었을 때 유럽으로는 헝가리와 보스니아 및 크림반도에까지, 아시아로는 이란을 지나 아프간 지역까지, 북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 알제리, 튀니지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집트와 아라비아 반도를 정복한 이후 오스만의 술탄은 칼리프(예언자 마호메트의 후계자)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세습권을 취득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이 되었다. 이렇게 무한정 커져 갈 것만 같던 오스만도 1690년대에 들어서면서 차츰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6세기부터 18세기 침체기까지 이 도시에 아름다운 유럽스타일의 사원들과 궁전들이 보스포러스 해안을 따라 세워졌으나 일련의 지진과 화재로 도시는 상당히 많이 파괴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내부적으로 관료들의 부패와 권력투쟁, 그리고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인한 광대한 영토 내의 민족적 독립 운동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은 여전히 지나친 자신감과 안일에 빠져 있었습니다. 반면 유럽사회에서는 종교개혁, 해양진출, 신대륙발견 등으로 이른바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오스만은 유럽 열강들의 연합 또는 경쟁적 전쟁 등으로 인해 차츰 그 영토를 잃어가기에 이르렀다. 
 
영토를 잃어가던 오스만은 유럽의 개입을 막기 위하여 개혁을 선포하고, 이러한 일련의 개혁과정 속에서 신흥 지식인 계층으로서 이른바 '청년터키인(Young Turks)' 계층이 등장하게 된었으며, 이들은 제국의 회생을 위해서 정치적 자유와 입헌 정치를 기치로 반정부 투쟁에 나서고 있었다. 이들에게 정치적 탄압을 계속하던 술탄은 마침내 일시적으로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입헌군주제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술탄은 다시금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독일과 동맹을 맺고, 동맹국의 패배로 끝나고 오스만의 영토는 연합군에 의해 분열되어 버렸다.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은 1918년 연합국과 몬도로스(Mondoros) 협정을 체결, 제국이 연합군의 분할 통치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러한 유럽 열강의 제국분할은 터키인들의 저항을 일으켜 독립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독립권 상실 이후 오스만의 일부 군사령관, 지방 유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투쟁이 개시되었고, 이때 등장한 인물이 터키의 초대대통령이자 국부(國父)의 호칭을 받은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었다.

케말은 1923년 10월 29일 터키공화국(Türkiye Cumhuriyeti; Republic of Turkey)을 선포하였고, 문자개혁(지금 쓰는 터키 알파벳이 이 때 만들어집니다), 성씨개혁(이전까지 터키를 비롯한 아랍인들은 성이 없었음), 종교국가의 폐지 등등 많은 부분에서 개혁을 이룩했다. 1934년에 대국민의회(터키의 국회)에서는 케말에게 '아타튀르크'(터키인의 아버지)라는 의미의 성씨를 증정하였다. 1938년 아타튀르크 사망 당시 터키공화국은 이미 서유럽세계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수도가 앙카라로 이동됐지만 이스탄불은 변함없이 중요한 도시로 인정 받았다. 화려했던 역사의 흔적과 현대 문명이 어우러진 이스탄불은 여전히 아름다운 환경과 생활모습으로 전 세계 여행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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