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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화로와 군고구마
2012-11-22 01:07:43최종 업데이트 : 2012-11-22 01:07:43 작성자 : 시민기자   김석원

점심시간에 밖에 나가 식사를 하고 돌아오던중 코를 자극하는 어떤 냄새에 멈칫 했다. 그건 군고구마 냄새였다.
잘 익은 군고구마 냄새에 발걸음이 멈춰졌다. 한봉지 가득 사 들고 가서 직원들과 나눠 먹을 생각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러나 내 눈에 군고구마 장수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고구마 냄새 말고 장작 태우는 냄새가 조금 더 같이 났을뿐.

그러고 보니 길가에 빌라를 짓는 공사판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발견할수 있었다. 슬그머니 다가가 들여다 보니 공사판 인부들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면서 공사하다 남은 폐목재를 태우면서 불을 쬐고 있었고, 그 장작불에 고구마를 굽고 있었다.  몇 명의 인부가 군고구마를 까서 먹고 있었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침을 꼴깍 삼키며...
공사판 인부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불에 고구마를 구워먹는 모습을 보고 나니 어릴적 시골에서 방안에 피웠던 화롯불이 올랐다. 질화로에 장작을 때고 남은 잉걸(활짝 피어 이글이글한 숯불)을 가득 담아 방안을 훈훈하게 데워주던 난로 대용. 

난방시설이 변변치 못하던 시절, 질화로는 방안을 정말 훈훈하게 덥혀주던 중요한 난방기구였다. 
옛날 우리 집에는 화로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무쇠로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질화로이다. 아버지께서는 반영구적인 무쇠화로를 놔두고 겨우내 질화로만을 쓰셨다. 

양주동 시인은 "되는대로 만들어진, 흙으로 구운 질화로는 그 생김생김부터가 그들처럼 순박하고 단순하건마는 지그시 누르는 넓적한 불돌아래, 사뭇 온종일 혹은 밤새도록 저 혼자 불을 지니고 보호하는 미덥고 덕성스러운 것이었다"고 읊었다. 

그 시절 마을에는 질시루와 자배기를 굽는 가마가 있었다. 보름에 한번씩 가마를 굽는데, 그 때마다 잘못 되어 일그러진 것이 몇 개씩 나왔다. 그것을 공것으로 얻기가 수월해서였을까?
"화롯불은 쑤석거리지만 않으면 오래 간단다."
아버지는 새벽마다 장작불을 지펴 소여물을 끓이셨다. 그리고 화롯불을 담아놓아 온종일 방안이 훈훈하였다. 

찬바람에 꽁꽁 언 손을 비비며 방안에 들어서면 어머니는 질화로의 부젓가락으로 헤치고 손을 쪼여주었다. 얼얼하게 언 손은 금새 녹았다. 
질화로에 삼발이를 놓고 뚝배기 된장을 보글보글 끓이거나, 석쇠를 걸쳐놓고 김이나 간고등어를 굽기도 했다. 
하지만 질화로의 가장 좋은 쓰임새는 고구마 굽기였다. 군것질거리라고는 한겨울에 고구마가 전부인 마당에 그만한 조리기구가 따로 없었다. 

질화로와 군고구마_1
질화로와 군고구마_1

긴 겨울밤은 질화로에 묻어 놓은 고구마가 익어가고, 질화로 가에서는 두런두런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겨울방학 때 늦잠을 자다가도 노릇노릇하게 익어 가는 고구마의 냄새에 이끌려 일어나곤 했다. 
화로 가에 형제들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앉아 조그마한 것이라도 서로 나누며 다독이는 마음은 그 당시에 가난을 극복하며 서로 보듬고 아껴주는 마음을 여는 시간이자 장소였다.

그러나 이젠...세월이 바뀌어 화로라는 물건은 사라지고 최신형 난방기가 가정이든 회사든 모든 실내를 차지하고 있다.
그 덕분에 질화로 근처에 모여 앉아 서로를 안아주고 감싸주던 가족끼리의 화롯가 사랑이 사라졌다. 당시에 화롯가에서 형제들끼리 웃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던것도 알고보면 참 소박한 스킨십이었는데.

항상 따뜻하고 구수했던 화로는 이제 우리 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첨단과학문명을 활용한 난방기구로 인해 화로 없이도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수십년전의 잊고 지내던 질화로를 떠올리며 마음의 평화를 찾아보자. 그 주위에서 다리 뻗고 함께 앉아 네것 내것 가릴것 없이 함께 나누며 웃고 행복했던 가족애를 떠올려 보자. 그런 마음의 여유라도 좀 갖고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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