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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도 잡고 오줌보에 바람 넣어 축구도 하던 추억
2012-12-16 16:23:26최종 업데이트 : 2012-12-16 16:23:26 작성자 : 시민기자   장영환
지금이야 마트든 집 앞 정육점이든 돈 들고 나가기만 하면 돼지고기를 얼마든지 사서 먹는 시대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 고향에서는 결혼이나 환갑잔치, 혹은 추석이나 설 명절이 돼야만 돼지고기 구경을 할수 있었다. 
그때는 부자라고 해서 소를 잡거나, 가난하다고 해서 염소나 닭을 잡는 것을 본 적이 없이 거의가 돼지를 잡았다. 그러고 보면 그래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가축은 역시 돼지였던게 아닌가 싶다. 

폭설이 내렸다는데 시골에 두 어른 덩그러니 계신 것이 아들 된 마음에 죄송스러워서 내려간 주말. 마을에서 총회를 한다며 돼지를 잡는다 했다.
이장님네 안마당에서는 정말 덩치 큰 돼지를 한 마리 잡았다. 오랜만에 보는 큰 구경거리였다. 

고향에 내려가 돼지 잡는 모습을 보니 어릴적과는 많이 달랐다. 돼지 한 마리 잡는다는 소문이 돌면 동네 크고 작은 꼬마들이 죄다 모여 서커스 구경하듯 했던 70년대 말, 그때와 달리 어린 아이들은 한명도 없었다. 
그저 돼지 잡는 작업을 하시는 마을 어른 몇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뿐.

그래도 돼지 잡는 모습을 보니 내 어릴적 청년이셨던 어르신의 칼솜씨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오랜만에 정말 나를 옛 추억속으로 끌고 가셨다.
명절이나 아니면 마을에 큰 잔치가 있기 하루 또는 이틀 전에 돼지를 잡게 된다. 아무나 잡는 듯 하지만, 사실은 돼지를 잘 잡는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 칼을 잡지, 어중이 떠중이가 칼을 들이대는 것은 아니었다. 

돼지 잡는 것에 대한 내 첫 기억은 일곱 살때쯤으로 기억난다. 그날도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형아들이 곧 돼지를 잡는다며 구경하자고 했다. 나는 돼지를 잡는다는 말에 병아리 잡기 말고 돼지를 잡는구나 하고 기대를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형아들은 나보고 바보라고 했다. 돼지 잡는 놀이가 아니라며 "이그, 이 멍충아, 그래 돼지를 잡는 놀이를 하는게 아니라... 돼지를 죽인다고. 그래야 고기를 먹지 바보야"

조금 있으니까 마당에 돼지가 새끼줄에 주둥이며 팔다리가 꽁꽁 묶여서 끌려나왔다. 잡혀온 돼지는 비명을 지르고 두려워 떨었다. 그 돼지의 모습은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조금 있으니까 흰 한복을 입은 키가 어른이 오셨다. 그 어른의 모습은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다. 키는 아주 크고 풍채는 기골이 장대했다.  희디 흰 한복에 빳빳하게 풀을 먹여서 걸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그런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상투를 틀고 이마에도 흰 두건을 둘렀다. 손목에도 발목에도 흰 띠를 둘러서 소매와 바지가 펄럭이지 않도록 했다. 손에는 칼이 들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애덜은 볼게 못된다 잉. 어여들 집으로 돌아가 덜... 험 흠...흠" 하시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거기서 물러설 우리가 아니었다. 그 재미난(?) 광경을 놓칠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약간 먼발치서 형아의 손을 잡고 돼지 잡는 모습을 지켜 봤다. 담장이 없이 나무로 막은 사립문엔 동네 형들과 누나들이 새까맣게 모여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앞다리와 뒷다리를 묶인 통증과 공포감에 휩싸인 돼지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주둥이도 여지 없이 새끼줄로 묶어서 입을 벌리지 못하게 해놨기 때문에 돼지의 고함소리는 희망이 없다. 사람은 입을 막아도 코로 숨을 쉴 수 있지만, 잘 알다시피 돼지는 콧구멍과 입이 같이 나란히 있어서, 입을 묶으면 코도 막히게 되어 숨도 쉴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나는 그걸 한참 후에 알았다.

입이 묶인 채로 거품을 내품고, 숨을 헐떡이며, 소리를 꽥꽥 지르는 돼지를 보던 일곱 살때의 기억. 그러나 그때는 돼지 잡는게 신기했을뿐이었다. 
돼지 잡는 우물가에는 큰 가마솥에 뜨거운 물이 펄펄 끓고 있다. 또 그 옆에는 잔치를 벌이는 집의 아낙네가 시퍼런 부엌칼을 쓱쓱 갈며 "큰 다라(다라이라는 일본말. 아주 큰 그릇)를 가져와라"며 다른 사람에게 손짓을 한다. 

드디어 시퍼런 부엌칼을 쥔 사람이 접근한 뒤.... 돼지는 사람들을 위해 맛있는 고기를 내어주고 끓는 물이 운반되면 몇 사람이 달라 붙는다. 돼지 몸에 끓는 물을 부은 다음, 사람들은 두 손으로 털을 뽑는다. 잘 뽑히지 않는 부분은 면도칼이나 부엌칼로 싹싹 밀어 그야말로 발가벗긴 돼지가 된다. 

이때 먼발치서 구경하던 아이들은 돼지고기 근처로 몰려든다. 아이들은 바로 옆에 피워 놓은 모닥불에 고기 몇첨 뚝 떼어 구어줄 잔칫집 인심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칼잡이 아저씨는 뒷다리 한쪽 쓱 발라내 잘게 자른다음 불 위에 얹어진 석쇠에 척 던져 주며 "옛다, 이건 늬덜 몫이다"라며 그 위에 굵은 소금을 술술 뿌려준다.
그게 다 익기도 전에 아이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기다렸다가 한두첨씩 맛나게 얻어먹는다. 그 별미의 맛이란...

 
돼지도 잡고 오줌보에 바람 넣어 축구도 하던 추억_1
돼지도 잡고 오줌보에 바람 넣어 축구도 하던 추억_1

그리도 두 번째 중요한게 남아있다. 그건 돼지 오줌보다. 
돼지를 잡은 아저씨는 오줌보를 떼어 멀리 마당에 내 던지며, "옛끼, 여기있다"라고 소리침과 동시에 아이들은 그것을 잽싸게 주워든다.
흙이 묻은 오줌보를 주은 다음 대충 씻은 후 그 속에 바람을 넣고 주둥이를 실로 묶는다. 그러면 여태까지 보지 못한 훌륭한 축구공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용되는 축구공보다는 좀 작지만 물렁물렁하고 잘 굴러가는 것이어서 부러울 것이 없는 장난감이 된다. 

모든게 귀했던 시절, 축구공 하나 가지고 있으면 남자아이는 그야말로 골목대장이 될수 있었다. 혹여 눈밖에 나서 축구경기에 못끼게 될까봐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눈치만 졸졸 살피며 축구공을 따라다녔다. 
조금 놀다보면, 흙이 천지에 묻어서 흙 공인지 돼지 오줌통 공인지 알 수 없는 형태가 된다. 조금 차다 보면 서서히 바람이 빠져 볼품없는 쭈구렁 망태 공이 되지만, 그래도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축구공임에 틀림없었다. 

지금이야 돼지 고기든, 축구 공이든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그때 잔칫집에서 잡는 돼지고기만큼 맛난 고기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나이 40대 중반 넘는 분들중 그때 시골에 살았다면  돼지 오줌보로 만든 그걸 다들 기억하실 것이다.
요즘 아이들 같으면 돼지오줌보로 축구공을 만들어주면 지린내 난다며 당장 저만치 도망가버리고 말텐데, 그 냄새 나는 돼지 오줌보 하나만 있어도 행복하게 놀수 있었던 그시절의 아이들이 물자는 풍족해도 이미 놀 땅을 잃어버린 지금의 아이들보다 훨씬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게 아닌가 싶다.

추억에 젖다 보니 돼지 잡는 일이 끝났다. 
다 잡고 난 돼지고기 앞다리살 서근을 뚝 떼어 어머님께 갖다 드리고, 다시 댓근을 뚝 잘라 값을 치른 후 마을 어르신들 드시라고 기증했다. 이장님이 껄껄 웃으시며 "잘 먹을껴. 고맙네 이 사람"하시며 호방하게 내 어깨를 툭 치셨다.
돼지 잡는 이장님댁 안마당을 등지고 돌아 나오면서 그 시절, 참으로 그리운 그 시절이 생각나 한번 더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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