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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호국보훈의 달 수원 보훈원에서 참전용사가 들려준 얘기들
나라사랑 겨레사랑 모두가 소원해야 할 노래다
2024-06-27 11:41:30최종 업데이트 : 2024-06-27 12:48:44 작성자 : 시민기자   안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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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들이 거주하는 보훈원 전경

 

지난 24일 필자는 수원시 장안구에 소재한 참전용사들이 거주하는 보훈원을 방문했다. 나라를 위하여 헌신한 분들이 여생을 보내는 실버타운이다.(수원시 장안구 수일로 336번지 9)

방문 목적은 세 가지다. 첫째는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4주년을 맞이하여 그 참상을 후대들에 전해주고 싶었고, 둘째는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이후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상에 이르기까지 인적, 물적 피해들을 상기하고 싶었다. 셋째는 전 국토가 유리됐던 참상이었지만, 세계 250여 개 국가 중에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자랑할 수 있었던 국민의 저력에 대하여 재삼 감사할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6.25 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다. 이후 한국군(경찰 포함) 62만여 명과 유엔군 15만여 명 등 77만여 명이 전사, 부상, 실종되었다. 전쟁으로 발생한 이재민은 1,000만여 명이 넘었다. 이는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피해를 본 것으로 가족을 잃거나 헤어진 사람들은 지금도 고통받고 있다.

 

당시 대한민국은 전쟁에 대비할 수 없었고 국가 차원의 전쟁 계획도 없었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었고, 항공기는 한 대도 없었다. 그때를 상기하며 6.25전쟁 시 참전했던 어르신들을 인터뷰했다. 보훈원 총무를 담당하는 조순옥 선생과 미리 연락이 닿아 참전용사와 그 유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분들의 생생한 이야기로 전쟁의 참화를 상기하는 시간이 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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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용사 김영복 선생님


Q. 김영복 선생님 반갑습니다. 6.25 전쟁 74주년을 맞이하여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그 당시 전투 상황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해 주시죠.

 

A. 나는 올해 32년생 만 92세다. 18세 때 입대하여 만 3년간 근무하고 1954년 제대했다. 계급은 하사였다. 육군통신학교를 졸업하여 중부 전선에 있는 금화지구, 백마고지, 철원 등지에서 근무했다. 금화지구는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피아(彼我) 간에 전투가 치열했다. 밤낮이 없었다. 나는 통신부대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병부대에 배속되어 전선을 가설했다. 통신을 전할 때는 모스 부호를 사용했는데, 여러 사람이 가서 발전기를 돌려야 가능했다. 백마고지는 아군과 적군이 12번이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 그 와중에서 취사병들이 부대원들의 영양 보충을 위하여 애를 많이 썼다. 그 당시 경제 여건은 참 빈약했다. 콩나물국, 시래깃국, 밥 한 공기가 전부였다. 다행히 통조림 전투식량이 보급되어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 주로 고등어였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며 미국에 보상하고, 미국이 한국군에 다시 지급한 것이다. 수송용으로 일본산 트럭과 미국산 지프차가 운용되기도 했다. 식량 수송부대원은 지게로 음식을 군인들에게 전했는데 이들은 비전투 요원이었다. 징집 형태였다. 안타까운 일은 수송 중에 적들의 포탄에 맞아 생을 달리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게에 실렸던 주먹밥들이 길에 나뒹굴기도 했다. 그러면 병사들은 손으로 흙을 털고 먹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전투 중 중공 인민군과 조우하기도 했다. 포로로 잡은 중공군들은 남루한 옷차림에 군복, 농구화가 든 배낭이 전부였다. 부산 입성 시 새 옷을 차려입고, 시가지라도 갈 계획이었나 보다. 특이한 게 개인화기가 없고 수류탄만 소지했다. 인해전술이 그들의 주특기였다. 아군들을 포위해 가서 꽹과리 치는 것은 일과였다. 총소리보다 밤마다 꽹과리 소리로 위협하는 것이 더 두려웠다. 6.25 전쟁 중 제일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에서 많은 군인들이 전사했다. 부산까지 점령당할 뻔했다. 특히 대구 경상도 사람이 많았다. 시체를 찾지 못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얼마 전 유골이 발견됐는데, 그 지역 주민들이 유가족들에게 농산물을 전달해 주는 미담도 있었다. 유명한 백선엽 장군은 지휘관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나는 보훈원 입주 13년 차다. 입주하면서 전쟁 당시 수색 중대장을 여기서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얼마나 감회가 있던지. 여기는 다양한 편의시설이 있어 지내기가 편안하다. 직원들도 가족처럼 대해주니 이보다 더 감사한 것이 없다. 현재 딸 셋이 있다.

또 한 명의 참전용사였던 고(故)장중복 님의 아내 박춘자 여사님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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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고 장중복 님의 아내 박춘자 여사님


Q. 선생님 안녕하세요. 전쟁 와중에 겪었던 얘기들을 들려주시죠.

 

A. 남편은 의무병이라 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밤낮이 없었다. 강원도에서 피난 후 의무병이던 남편과 결혼해서 대전으로, 대구로, 온양으로 옮겨 다녔다. 슬하에 딸만 여덟이었는데 1명은 죽고 현재 7명이다. 남의 밭에 가서 감자를 캐 주면서 감자를 얻어다 끼니를 이어갔지만, 대식구들을 건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택한 것이 장사였다. 뻥튀기 장사부터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남편은 전쟁 중에 밀려드는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얼굴 보기 어려웠다. 누구나 겪었던 일이지만 하루하루 사는 것이 힘들었다. 나는 올해로 보훈원 입주 20년 차다. 노후에 이렇게 환경 좋은 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어 감사하다. 직원들이 가족처럼 잘 대해주니 이 또한 감사하다. 숙소와 음식 제공, 의료시설 등이 있어서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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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의 작품 전시 모습


주위의 경관을 둘러봤다. 풍광 좋은 광교산 자락 옆으로 계곡 물이 흐르고, 숲속에 위치한 보훈원의 복지타운은 안온했다. 분위기뿐만 아니라 어르신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편안해 보인다. 이는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스태프들이 정성을 다하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싶다. 건물 구조는 연로하신 분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하게 지어졌다.

 

무엇보다도 원내 병원이 있어서 유사시 대처할 수 있다. 위중할 때는 큰 병원으로 이송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보훈원 거주 어르신들은 젊을 때 국가를 위하고 노후에 이렇게 쾌적한 곳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었다. 듣는 필자도 마음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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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맛있게 드시는 어르신들의 모습

없음정서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정원

 

현재 보훈원에는 참전용사 등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121명이 거주하고 있다. 필자가 보훈원을 방문 취재한 목적도 전쟁의 참상을 알리며 다시는 이 땅에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에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20여 개국이 독립했지만,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전쟁의 비극을 딛고 일어선 선대들의 헌신과 수고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기회가 되는 대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한 번은 보훈원을 방문하여 그분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해 드리면 큰 힘이 될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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