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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우리의 자랑거리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조선왕조의 의례와 의궤’ 강연 열려
2024-07-15 11:38:34최종 업데이트 : 2024-07-15 15:37:02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조선 시대 의궤 기록을 디지털 기술로 복원한 콘텐츠로 볼 수 있는 '조선의 희비애락, 한눈에 보다' 전시와 연계한 특별강좌가 열렸다. 박미선 교수가 '조선왕조의 의례와 의궤'를 강의하고 있다.

조선 시대 의궤 기록을 디지털 기술로 복원한 콘텐츠로 볼 수 있는 '조선의 희비애락, 한눈에 보다' 전시와 연계한 특별강좌가 열렸다. 박미선 교수가 '조선왕조의 의례와 의궤'를 강의하고 있다.


  수원 화성박물관에서 '조선의 희비애락, 한눈에 보다'를 전시 중이다. 여기서는 조선 시대 의궤 기록을 디지털 기술로 복원한 콘텐츠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7월 10일 박물관 영상교육실에서 전시연계 특별강좌가 있었다. 박미선(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교수가 '조선왕조의 의례와 의궤'를 강의했다. 
  박 교수는 "조선왕조의 전례서와 의궤는 예치 국가의 성격을 드러낸다. 전례서가 표준 의례서라면 의궤는 실행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실행 보고서의 축적으로 표준 의례서의 수정 보완이 이루어지고, 다시 현실적 요건을 고려하여 행사가 이루어지면서 실행 보고서가 작성되었다."라고 말하며, 이런 "의미에서 의궤는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한다고 설명했다. 
의궤는 어람용(임금)과 분산용으로 제작했다. 어람용은 녹색 비단에 아름다운 문양을 넣었다. 변철은 철장이라고도 하고 여기에도 문양을 예쁘게 넣었다. 반면 분산용은 밋밋하다.

의궤는 어람용(임금)과 분산용으로 제작했다. 어람용은 녹색 비단에 아름다운 문양을 넣었다. 변철은 철장이라고도 하고 여기에도 문양을 예쁘게 넣었다. 반면 분산용은 밋밋하다.


  조선은 예에 대한 기본 의식을 바탕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제도적 규제와 실천을 위한 예제와 의례를 만들어 이상사회를 구축하고자 했다. 조선의 설계자인 정도전부터 예는 국가의 질서를 바로잡는 데 있어서 중요하게 여겼다. 
  성종 때는 《국조오례》를 편찬했다. 오례는 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로 국가의 기본예식이다. 이는 당나라 두우가 편찬한 《통전》의 체재에 따라 정했다. 이에 따라 조선 왕실의 의례는 더욱 체계화됐고, 그 기록을 남기는 의궤 작성도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대한제국 시절 의궤. 왼쪽 황색 비단으로 장정한 의궤는 황제 어람용. 오른쪽은 황태자 예람용.

대한제국 시절 의궤. 왼쪽 황색 비단으로 장정한 의궤는 황제 어람용. 오른쪽은 황태자 예람용.


  의궤는 중국에 남북조시대부터 유교와 불교 관련 서적에 나타났다. 우리나라는 고려 때 기록이 보이고, 팔만대장경 중에도 의궤라는 이름을 가진 불경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왕실이나 국가의 행사를 기록한 의궤는 조선이 건국된 직후다. 책 의궤는 1395년(태조 4)에 작성된 《경복궁조성의궤》가 처음이다. 태조가 승하 후 국장을 진행한 후 《태조강헌대왕상장의궤》도 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제작된 의궤는 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뿐이다.
임진왜란 이전 의궤는 존재하지 않는다. 1600년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의궤를 꾸준히 작성하였다.

임진왜란 이전 의궤는 존재하지 않는다. 1600년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의궤를 꾸준히 작성하였다.


  이유는 임진왜란(1592~1598)을 겪으면서 조선 전기의 의궤들은 거의 유실되었다. 화재로 인한 소실과 왜병에 의한 약탈이 그 원인이다. 따라서 현재 의궤는 임란 이후에 편찬한 것들이다. 왜구의 침입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백성을 힘들게 했지만, 국가 유산을 훼손한 것도 큰 아픔이다.
  그러다 보니 현존 의궤 중 1600년(선조 33)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의궤를 꾸준히 작성하였다. 영조 대에 의궤가 많이 제작되었고, 숙종, 순조, 고종 대에도 많이 작성되었다. 
장례에 사용된 제기를 도감을 통해 보고 있다. 당시 공예 수준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조선 시대 의궤는 국가 의식과 궁중 생활사를 자세히 볼 수 있다.

장례에 사용된 제기를 도감을 통해 보고 있다. 당시 공예 수준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조선 시대 의궤는 국가 의식과 궁중 생활사를 자세히 볼 수 있다.


  박 교수는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작성된 의궤는 총 608종이 남아 있다. 이들 내용은 국왕 및 왕비의 국장과 관련이 있는 의궤가 163종이다. 여기에는 국장, 빈전, 혼전, 산릉, 부묘에 관한 의궤가 있다."라고 설명하며, "국장과 예장에 관한 의궤가 35%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조선 시대 의궤는 역사적 가치가 높다. 국가 의식과 궁중 생활사를 자세히 볼 수 있다. 행사 준비 과정부터 실행까지 기록과 그림으로 자세히 남겼다. 그림은 복식 등에서 미술 수준을 이해할 수 있고, 제기 등 각종 도구는 공예 수준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경국대전과》과 《국조오례》. 조선은 예에 대한 기본 의식을 바탕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제도적 규제와 실천을 위한 예제와 의례를 만들어 이상사회를 구축하고자 했다.

《경국대전과》과 《국조오례》. 조선은 예에 대한 기본 의식을 바탕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제도적 규제와 실천을 위한 예제와 의례를 만들어 이상사회를 구축하고자 했다.


  궁궐 중심의 행사지만, 일반 백성의 생활도 짐작할 수 있다. 행사에 쓰인 각종 물품과 도구들 제조에 참여한 장인의 명단과 그들이 받은 인건비 등의 기록도 있다. 물건비 등도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재정 상황과 물가동향도 알 수 있다. 
  의궤는 오직 조선왕조에서만 발달한 기록문화다. 중국에서도 주요 궁중 행사를 그림으로 설명한 자료가 있지만, 조선의 의궤처럼 행사의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없다. 이런 이유로 《화성성역의궤》를 비롯한 왕실 의궤는 조선왕조실록 등 다른 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기존 의궤들과 달리 정조 이후는 활자로 제작된 의궤가 등장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성역의궤》는 정리자라는 금속활자로 제작됐다.

기존 의궤들과 달리 정조 이후는 활자로 제작된 의궤가 등장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성역의궤》는 정리자라는 금속활자로 제작됐다.


  간혹 외국에 나가면 그 나라 문화에 감탄한다. 특히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을 보고, 우리는 왜 저렇게 웅장한 문화유산이 없냐며 비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버금가는 세계유산이 있다. 의궤를 비롯한 기록문화다. 오백 년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각종 의궤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유산이다. 단순히 눈으로 비교할 수 없는 인류의 정신적 유산이다. 세계도 감탄하고 있다.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뿌듯한 마음이 든다. 
조선 시대 선조 이후 의궤 제작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영조 대에 와서 의궤 제작이 급격하게 늘었다.

조선 시대 선조 이후 의궤 제작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영조 대에 와서 의궤 제작이 급격하게 늘었다.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 의궤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인양요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잃어버린 의궤 이야기에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깊었다. 여전히 프랑스와 일본 등에 있는 우리 의궤를 찾아오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의궤에 대한 관심으로 이날 강의는 참석자가 많았다. 강의를 들으면서 저마다 뿌듯한 마음을 지녔지만, 한쪽으로는 지나간 역사에 아쉬움이 깊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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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 오례, 국장, 정조, 영조, 화성성역의궤,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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