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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에 작은 박물관이 생겼다
우화관, 별주 복원 과정 담아
2024-07-29 11:16:00최종 업데이트 : 2024-07-29 11:15:55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우화관은 1789년에 세워진 화성유수부의 객사로 왕을 상징하는 전패가 보관되고,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던 곳이다. 우화관 복원으로 화성행궁이 본 모습을 찾았다.

우화관은 1789년에 세워진 화성유수부의 객사로 왕을 상징하는 전패가 보관되고,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던 곳이다. 우화관 복원으로 화성행궁이 본 모습을 찾았다.


  수원 화성행궁이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복원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잃어버린 역사까지 함께 왔다. 우화관과 별주 안에 전시관을 마련했다. 전시관에는 복원 과정에서 나온 유물을 전시하고, 복원 과정을 문자와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치 작은 박물관 같다.
  우화관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됐다. 1905년에 이곳에 수원 공립소학교가 들어왔다. 근대 교육 명목이었지만, 조선 행궁을 파괴하는 만행이었다. 1989년에 화성 복원 추진이 진행되고, 유네스코 등재까지 했지만, 우화관 자리에는 학교가 버티고 있었다. 오랜 설득 끝에 학교는 광교로 이전하고 119년 만에 복원을 마무리했다. 
 
우화관에는 전시관이 있다. 삼국시대로 석실묘 부장품으로 항아리, 접시, 병이 발굴되어 전시하고 있다.

우화관에는 전시관이 있다. 삼국시대로 석실묘 부장품으로 항아리, 접시, 병이 발굴되어 전시하고 있다.


  단청이 곱게 복원된 우화관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가장 오래된 역사는 삼국시대로 석실묘 2기가 확인되었다. 부장품으로 항아리, 접시, 병이 발굴되었다. 이곳에 화성행궁 객사가 있다가 학교가 지어졌다.
  우화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수막새와 암막새, 방전(네모반듯한 벽돌) 등도 있다. 우화관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공간이므로 격식을 갖춘 기와 등을 이용해 지었다는 증거 유물이다. 객사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백자 향로와 그릇도 있다. 
 
우화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수막새와 암막새, 방전 등이다. 작은 전시관이 마치 박물관 같다.

우화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수막새와 암막새, 방전 등이다. 작은 전시관이 마치 박물관 같다.


  일제강점기에 우화관과 함께 행궁 전각도 수난을 당했다. 봉수당은 자혜의원으로 사용했는데, 당시 의원 유물을 볼 수 있다. 우화관을 둘러싼 물길에서 자혜의원 글씨가 새겨진 약병 등이 출토되었다. 잉크병 등도 나왔는데 땅속에서 오랫동안 훼손되지 않고 묻혀 있었다. 북군영은 경찰서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도 철모와 탄환 그리고 일본 경찰도, 포탄 등 무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우화관을 둘러싼 물길에서 자혜의원 글씨가 새겨진 약병 등이 출토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 궁궐을 마구 훼손했다. 봉수당도 자혜의원으로 사용했다.

우화관을 둘러싼 물길에서 자혜의원 글씨가 새겨진 약병 등이 출토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 궁궐을 마구 훼손했다. 봉수당도 자혜의원으로 사용했다.


  전시관에는 복원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설치도 했다. 1기 민선시장이었던 심재덕 시장, 문화예술인, 언론인, 주민들이 모여 시민운동으로 시작했다는 사실도 기록으로 남겼다. 우화관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처음 건립된 객사여서 화성성역의궤에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1797년에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서 만들었던 한글본 정리의궤 등을 참고하여 복원했다는 기록을 보게 했다. 
 
화성행궁의 역사를 사진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훼손된 역사와 그 후 복원 과정을 담았다.

화성행궁의 역사를 사진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훼손된 역사와 그 후 복원 과정을 담았다.

 
  화성행궁이 훼손된 슬픈 역사적 과정도 남겨 놓았다. 봉수당에 자혜의원이 들어섰다. 일본식 근대 병원으로 조선인을 위해서 자애로운 은혜를 베푼다는 이름이었지만,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 여기에 세운 것이다. 주요 전각도 병실과 약품 창고로 사용되었다. 경찰서와 헌병대 숙소로 사용되면서 행궁이 망가지고, 경기도립 병원을 건립하며 행군이 철거되기도 했다. 그나마 낙남헌과 노래당은 수원군청으로 사용되고 있었기에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다. 
 
취병과 낙남헌 연못. 고즈넉한 행궁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더해졌다. 행궁을 찾는 사람들도 풍요로움을 누린다.

취병과 낙남헌 연못. 고즈넉한 행궁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더해졌다. 행궁을 찾는 사람들도 풍요로움을 누린다.


  별주는 정조대왕이 행차할 때 음식을 준비하고 문서를 보관한 곳이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 때 처마를 덧붙여 만든 임시 건물 12칸에서 잔칫상을 준비했다. 별주는 제사에 쓰이는 제물과 왕실 잔칫상에 필요한 식자재를 준비하고 조리하는 것을 관리한다. 
  우화관과 비교해 별주는 단청이 없다. 우화관이 궁궐 분위기라면, 별주는 양반집 같다. 별주 대청과 행각 건물이 ㄱ자형으로 마주하고 있는데, 아주 소박한 분위기다. 별주 대청은 관원의 업무와 문서관리가 이뤄졌고, 행각은 음식 재료와 그릇 등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와 헛간으로 사용되었다. 관자이며 부엌이었다. 행각에 아궁이와 가마솥으로 부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도 복원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그리고 복원 관련 영상도 있다. 별주에는 목재와 석재가 도드라져 보인다. 화성행궁의 다른 전각에 비교해 아주 새것이다. 
 
별주. 정조대왕이 행차할 때 음식을 준비하고 문서를 보관한 곳이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 때 잔칫상을 준비했다.

별주. 정조대왕이 행차할 때 음식을 준비하고 문서를 보관한 곳이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 때 잔칫상을 준비했다.


  복원은 아예 없어진 유물이나 유적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이에 대해 오선화(수원시 화성사업소) 학예연구사는 복원 과정의 여러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목재를 그대로 구할 수 없는 대신 우리 전통의 수종의 소나무를 아주 잘 건조한 것만 골라서 사용했다. 석재도 화성 축성 당시에는 인근에 있는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에서 돌을 다 수급을 했지만, 지금은 채석할 수가 없다. 그래서 화성행궁에 사용된 돌과 가장 유사한 색감과 재질이 가장 유사한 포천에서 생산된 포천석을 썼다(7월 25일 한국방송 인사이드 경인에서 인용)."라고 말했다. 
 
별주 전시관. 별주 복원 과정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별주 전시관. 별주 복원 과정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화성행궁은 600칸에 달하는 정궁 형태로 행궁 중 규모가 가장 크다. 2002년 1단계 복원사업이 완료되고, 2단계 우화관과 별주 복원사업으로 본 모습을 찾았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역사와 민족정신을 회복한 의미도 있다. 
  복원 과정을 담은 작은 전시관은 화성행궁에 숨어 있는 역사를 이해하고, 선조의 생활을 상상할 수 있다. 연못도 두 군데나 복원 조성되었다. 고즈넉한 행궁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행궁을 찾는 사람들도 풍요로움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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