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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박물관에서 만난 수원의 유물들
'화성전도 12폭 병풍', '김준룡장군 전승지 비석' 등 관람
2024-08-08 11:25:35최종 업데이트 : 2024-08-08 11:25:33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박물관

수원박물관 앞에서 (사)화성연구회 회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화성연구회는 8월 모니터링 활동으로 수원박물관을 방문해 수원 및 서예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원박물관 2층 오른쪽으로 가면 수원역사박물관이 있는데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수원의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선사시대, 청동기시대 등의 유물을 보고 나면 '김준룡장군 전승지 비석' 모형을 만날 수 있다. 큰 바위 중간을 비석 모양으로 다듬고 그 안에 글자를 새겼다. 비문 중앙에는 큰 글씨로 '충양공김준룡전승지(忠襄公金俊龍戰勝地)', 오른쪽에는 작은 글씨로 '병자청란공제호남병(丙子淸乨公提湖南兵)', 왼쪽에는 '근왕지차살청삼대장(覲王至此殺淸三大將)'라고 쓰여 있다.

실물은 광교산 종루봉 바로 아래에 있다. 종루봉으로 가는 등산로 길가에 문화재 안내판이 있다. 그곳에는 김준룡 장군(1586-1642)의 전승지에 비 모양으로 암반에 글자를 새긴 것이라고 되어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재임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사를 이끌고 광교산에 이르러 청나라 태조의 매부이자 후금 태조의 사위이며 적의 장수였던 양고리 등을 사살했다.

김준룡 장군은 1792년 정조대왕으로부터 '충양공(忠襄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화성 축성의 총리대신이었던 채제공이 석재를 구하기 위해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김준룡 장군 전승 사실을 새기라 했다고 기록했다. 1977년 경기도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수원박물관에서 김준룡 장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수원박물관에서 김준룡 장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모니터링위원장이 비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김준룡 장군 전승비를 직접 본 분이 계신가요? 수원시에 흩어져있는 많은 문화재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접근하기가 힘들지요. 반딧불이 화장실 옆 등산로에서 출발하면 백년수 정상, 형제봉, 양지재를 지나야 하는데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립니다. 등산이 힘든 사람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문화재입니다. 이 모형 옆에 터치스크린 설명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네요. 설명문에서 수원군읍지에는 1794년(정조 18년)에 화성 축성을 관리하던 채제공이 화성의 석재를 캐기 위해 광교산을 다녀간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듣고 광교산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하였다고 설명해 놓았었는데, 수원군읍지에는 화성 축성의 책임자였던 총리대신 채제공의 명으로 비를 새겼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872년 제작한 '수원부 지도'와 1899년 편찬한 '수원군읍지' 고적 편 광교암 설명에는 김준룡 장군의 승전 사실만을 기록하고 비문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에도 관련 내용이 없고 그 어디에도 비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충양이라는 시호를 내릴 당시에는 채제공이 좌의정으로 있을 때였는데 당연히 채제공도 김준룡 장군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석은 언제 누구에 의해 조성되었는지가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수원박물관에서 화성전도 12폭 병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화성연구회가 수원박물관에서 화성전도 12폭 병풍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화성전도 12폭 병풍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해설이 있었다. 이 그림은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수원화성과 북쪽으로는 지지대고개부터 남쪽으로는 독산성까지 그렸다. 이 그림을 그린 시기도 추정할 수 있다. 이 그림에는 화령전, 지지대비, 매향교가 있고 장안문과 팔달문 옹성 홍예 위에 누각은 없다. 화령전은 1801년, 지지대비는 1807년, 매향교는 1814년에 세워졌고 옹성 홍예 위의 누각은 1824년에 세워졌다. 따라서 이 그림은 1814년에서 1824년 사이에 그려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모니터링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였다. "이 그림의 특이한 점은 수원화성 밖 숙지산에 '외포사'를 그렸고, 화령전 앞에만 홍살문이 있습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수원화성 밖에 있는 산 위와 평야에 돈대를 설치해 급한 일이 닥쳤을 때 경보를 알릴 수 있게 '용연', '문암', '쑥고개', '구산', '숙지산', '고양동' 등 6개의 돈대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실물 및 유구가 남아있지 않은데 이 그림에서만 '숙지산 돈대'를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화성전도 그림을 보면 화성행궁 신풍교 앞에 홍살문이 있었는데 이 그림에서는 화성행궁 앞에 있던 홍살문을 화령전 앞으로 옮겼습니다. 당연히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신 곳이 화령전이니 그쪽에 홍살문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의 홍살문 위치는 정체성으로 봤을 때 화령전 앞으로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수원박물관에서 어르신들의 체험

수원박물관에서 어르신들의 체험


단원 김홍도가 그린 화성 춘 8경 추 8경은 이후 수원 8경으로 정리되는 과정에서 화성 8경 병풍 시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8곳의 경관은 현재의 수원 8경과는 다른 '신풍효각', '병암간수', '동성봉화', '장대관사', '방화수류정', 용연순채', '화홍청수', '서대망월' 등 수원의 경승을 주제로 하고 있다. '장대관사'라는 시에는 '총리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작품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1802년 장용영을 혁파해 총리영이 되었고 1895년에 없앴다. 

수원박물관의 서예박물관에 있는 서예 작품

수원박물관의 서예박물관에 있는 서예 작품


정조 시대의 역사에 이어 근현대 수원의 역사를 훑어보고 복도에 전시된 사진을 보았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수원의 옛 모습을 보면서 상전벽해란 느낌을 받았다. 서예전시관으로 이동해 서예의 역사에 대해 해설을 들었다.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에는 수많은 현판이 있기 때문에 서예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해야만 현판의 가치를 알 수 있다. 

한 회원이 화홍문 현판이 진품이냐고 질문했다. "화홍문 현판은 당대에 유한지가 쓴 것입니다. 1846년, 1922년 홍수 때 화홍문 누각이 무너졌는데 이때 현판만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전하기는 합니다만, 금석학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봤을 때 현재의 현판은 복각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한지가 쓴 글씨를 현판에 새기고 현판을 탁본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1846년 화홍문 누각이 무너진 이후 1848년에 중수를 했는데 이때 탁본한 것으로 현판을 제작했고, 이 현판을 탁본한 것으로 1922년 홍수 이후 현판을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복각하면서 변형이 생기는데 유한지 글씨와 현판 글씨를 금석학적으로 봤을 때 이런 추정이 가능합니다."라고 위원장은 답변했다.

수원박물관의 서예박물관

수원박물관의 서예박물관


무더위로 인해 야외에서 진행했던 (사)화성연구회의 모니터링 활동을 이날 박물관에서 대신했다. 9월부터는 수원화성 구석구석을 모니터링 할 예정이다. 

<수원박물관 이용안내>

○ 관람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매표시간 오전 9시 ~ 오후 5시) *매주 월요일 휴관

○ 홈페이지: 바로가기 
○ 문의: 031-228-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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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박물관, 화성전도 12폭 병풍, 김준룡 장군, 화성연구회,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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