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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 농업발전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다
2025-10-14 10:35:18최종 업데이트 : 2025-10-14 10:35:17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누릇누릇 익어가는 벼가 가을을 느끼게한다

누릇누릇 익어가는 벼가 가을을 느끼게한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정치의 요체란 무엇입니까?" 하고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 왈 "정치란 백성들 등 따숩고 배불리 먹이는것"이라고했다. 이는 따뜻하게 잠잘 수 있는 주거지와 먹고살아갈 식량을 의미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요체는 국민들이 잘 살 수 있는 경제와 주거지다.


농사가 먹고사는 천하의 근본이었던 옛날에는 만인지상(萬人之上)인 임금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백성들이 배곯지 않고 배불리 먹고살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농업기반시설이 없으니 가뭄에는 비를 내려달라고 임금이 기우제(祈雨際)를 지내기도 했다.


10월은 땀 흘려 일 년 농사지은 추수의 계절(秋收의季節)이다. 수원역에서 상행선 전철을 타고 가다 왼편 창가를 내다보면 서호저수지 아래 누릇누릇 익어가는 벼를 보면서 가을이 영글어감을 느낀다.
 

누릇누릇 익어가는 벼가 가을을 느끼게한다

누릇누릇 익어가는 벼가 가을을 느끼게한다

화서역에서 내려 10분쯤 걸어가면 축만제(祝萬提)다. 축만제는 조선 정조대의 농업정책과 근현대에 이르러 국가주도의 농업개혁이 맞물리는 상징적 장소로 평가된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이장한 후 수원에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화성백성들을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고 백성들이 안정된 농업생산을 할 수 있도록 가뭄에 대비한 저수지와 수로, 둔전 등 농업기반시설을 조성했다.

 

정조는 1795년에 장안문 북쪽에 만석거(萬石渠)를 만들고 2년 후인  1797년에는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만년제(萬年提)를 조성하였다. 둔전(屯田국영농장)인 대유평야를 만들어 농지가 없는 백성들에게 둔전을 경작케 하여 생업의 안정을 갖게 했다.

 

가뭄을 대비한 수리시설(水利施設)과 둔전이 백성들의 생업이 안정되자 정조는 1799년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여기산 아래에 만석거와 만년제 3배 규모인 저수지를 조성하고 축만제라고 하였다. 축만제 아래에는 둔전을 만들어 농지가 없는 백성들이 안정된 농업생산을 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축만제 중앙에는 인공섬이 조성되어 있으며 ,당시 정조는 여기에 화초를심고 서호낙조(西湖落照)의 경관을 감상하게했다.

호수에 조성한 인공섬

축만제 중앙에 조성한 인공섬

 

호수에는 물닭과 오리, 가마우지 등 4~5종의 조류들이 서식하고 있다. 조류들의 유유자적 노는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게 망원경도 설치되었다. 저수지 수변에는 벚나무와 단풍나무를 심어 봄에는 벚꽃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들어 관광객들의 명소가 되었다. 

 

축만제는 여기산 서쪽에 위치하여 서호(西湖)라고 불려 오다가 경기도는 220년 전 정조가 지은 축만제 명칭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제방에 축만제 표지석도 세웠다. 축만제(祝萬堤)는 '천년만년 쌀 생산 만석을 축원한다'라는 뜻이라고한다.

옛 명칭인 축만제 표지석

옛 명칭을 복원한 축만제 표지석

축만제는 조선후기의 농업생산의 기반인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축만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16년 11월 국제 관개배수위원회의 세계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저수지의 둘레길은 약 2킬로로 화서동 주민들과 주변 시민들의 사계절 걷기 운동코스로 이용되고 저수지 수변에 자리한 서호공원에는 각종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걷기운동하는 시민들

축만제 제방을 걷는 시민들

농사를 근본으로 살아온 농민들은 1960 연대에도 여전히 가뭄에 하늘만 바라보는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가뭄이 들면 마을에 높은 산에 올라가 떡과 술, 과일, 돼지 머리를 놓고 천신(天神) 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기우제를 지냈다. 이러다 보니 모를 심어도 갈수기(葛水期)에 물부족으로 벼가 여물지 않아 쭉정이로 농사를 망치기도하고 잘 지은 농사래야 논 한 마지기(200평) 당 쌀 한 가마 또는 한 가마 반정도의 수확을 했다.


농민들은 대부분 네댓 마지기의 농사를 짓거나 소작농으로 어려운 살림살이에 식구(보통 6~`7명)가 많다 보니 1, 2월이면  쌀이 떨어져 봄에는 점심을 굶는 것은 일상적이고 장리쌀(5활)을 얻어다가 시래기 죽으로 연명했다. 장리쌀조차 얻지못하는 빈민들은 보리가 날 때(6월)까지 극심한 식량부족으로 식생활 불안정이 발생했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 정부는 식량증산 정책을 추진햇다. 이시기를 일명 '보릿고개' 라고했다. 70대 후반  80~90대 세대들이 어릴 적 '보릿고개'를 넘기며 살아온 세대들이다.

6월에 수확하는 보리

5월하순에서 6월에 수확하는 보리

정부는 '보릿고개'를 면하기 위해 식량증산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정조의 농업정책 표본지인 수원에 1962년 농촌진흥청을 설치하고 벼 다수확품종을 개발을 하게 했다. 축만제 인근 바둑판처럼 잘 정돈된 논은 1960년대 볍씨 품종개량 시험농장이다. 농촌진흥청의 볍씨 다수확 품종 시험재배 성공하자. 벼 명칭을 "통일벼"로 했다.

 

전국 각 읍면에는 농촌지도소를 설치하고 농민들에게 각종 농사정보와 영농지도에 나섰다. 농촌에는 새마을지도자 450명을 양성 영농 교육을 시키고  전국 농촌에 통일벼 재배를 적극권장했다. 정부는 가뭄 극복을 위해 농가에 정부지원금으로 논에 관정(管井)을 박고 지하수를 개발 가뭄을 극복하게 했다. 그 후 경지정리사업과 농업용수개발 관개시설로 수리안전답을 만들어 지금은 논 1 마지기 당 쌀 5 가마까지 생산한다.

 

이처럼 수원 농촌진흥청은 우리나라 1차 산업의 진원지로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생산 정책으로 보릿고개를 면하게 이끌었던 농업과 경제 발전의 진원지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중 정부기관 지방 분산정책으로 수원 농촌진흥청 본청을 전주시 덕진으로 이전해 근대 농업발전과 경제발전을 이끌어온 수원 농촌진흥청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아쉬움이 남는다.

옛 농촌진흥청 청사(현 선거연수원)

엣 농촌진흥청 청사(현 선거연수원)

정조가 만든 축만제는 지금까지 진흥청 벼 재배 시험답과 인근 논의 관개용수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220여 년 전 수원백성들을 위한 정조의 농업정책 표본이 박정희 대통령시대의 농업정책으로 이어지면서 전 국민들이 배불리 먹고살 수 있는 식량증산 진원지로 발전한 것이다.

 

축만제 제방에서 바라보는 드넓은 논에는 누릇누릇 익어가는 벼가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현재는 쌀 과잉생산이 지속되고 있으며 정부는 가격 안정을 위한 시장격리 정책을 운영중이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매년 30만톤의 쌀이 과잉생산돼 쌀값 안정을 위해 정부가 수매하는데 2024년도 양곡 매입비는 1조2266억 원 보관료는 4,061억 원의 예산이 지출되고 2016년부터는 3년이상 묵은쌀은 정부미 10분1 가격으로 동물사료로 판매한다니 시래기 죽으로 보릿고개를 살아온 세대들은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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