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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얼마나 더 당신을 씻겨드릴수 있을까
2012-12-31 12:26:29최종 업데이트 : 2012-12-31 12:26:29 작성자 : 시민기자   정진혁
아버지는 늘 밀짚 모자를 쓰곤 하셨다. 일을 마치고 아무리 멀리서 걸어오셔도 집 처마에서 그 밀짚 모자만 보면 "아버지시구나" 금새 알아 차릴수 있었다.
태양이 무르익는 여름이건,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철이건, 낙엽이 스산하게 길거리를 뒹구는 가을이건 간에 아버니는 늘 낡고 헤진 그 밀짚모자를 분신처럼 쓰고 다니셨다.

하지만 이제는 주인의 사랑이 식어 고향집 헛간 벽면에 쓸쓸히 걸려 있지만 그래도 수십년 아버지 곁을 지켜온 밀짚 모자다.
봄, 여름, 가을 농번기때 농삿일에 자쳐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땅방울의 그림자가 되어주던 밀짚 모자의 주인공, 나의 아버지.

 
앞으로 얼마나 더 당신을 씻겨드릴수 있을까_1
앞으로 얼마나 더 당신을 씻겨드릴수 있을까_1

그 아버지를 위해 나는 내 아들놈을 데리고 시골로 간다. 
부모님은 세상의 모든 어르신들이 다 그러하듯 도시에 사는 아들딸들에게 극구 올라오지 않으신다. 
"내가 거기 가서 뭐헌다냐. 그게 감옥이지 감옥."라시며 도시 생활을 한사코 거부하시는 마음도 이해를 못하는건 아니지만, 적막강산 시골집에 계신 부모님을 바라보는 아들은 늘 마음이 아프다. 

지난 토요일 오후, 미리 전화를 걸어 두고 떠난 길. 고향집 안마당에 들어서자 "왔냐" 하신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당신 마음에 서운치 않게 내려가 보려는 마음이지만 아들을 맞으시며 항상 똑같이 던지시는 "왔냐"를 들으면 가슴 한켠이 메어 온다. 
'많이 늙으셨구나...'

저녁때 어머니가 끓여 주신 맛난 된장찌개에 동치미를 얹어 식사를 마친 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잠자리에 들고 다음날 해가 떠오르면 난 물을 데워 목욕준비를 한다. 
농촌에서 마땅히 목욕하시기에 편치 않으시고, 시골 노인네가 읍내에까지 나가 대중목욕탕에 가시기도 어렵기다. 어머니께 목욕을 시켜달라기에도 쑥쓰러울 수밖에 없는 시골 어른이고  목욕물 데워서 씻는데 더욱 익숙하지 않으신 시골 노인이다.

연세가 있으시니 물의 온도 조절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체온에 민감하시기 때문이다. 우선 방 안에 사람 한명이 충분히 들어갈수 있는 크기의 통을 갖다 놓은 후 방안의 온도를 확인한 다음 통 안에 부엌에서 데워 놓았던 물을 갖다 붓는다. 뽀얀 수증기가 방안에 가득해지면 어머니는 슬그머니 이웃집 할머니댁으로 마실을 나가신다. 

한순간에 욕조로 변한 거대한 물통에 아버님의 온몸을 담가 목욕을 시켜드리면 몸이 약한 노인인지라 금세 숨이 차올라 아주 힘들어하시기 때문에 욕조 바닥에 작은 의자를 마련해 앉으시게 한 다음 목욕을 시켜드려야 한다. 먼저 낮은 의자를 준비해 더운 물 적신 수건을 그 위에 깔고 앉게 한다. 
그리고 의자에 앉은채 발을 따스한 무에 담그시게 한 뒤 적셔진 물수건으로 가볍게 등목욕부터 해드리고 몸 점체를 고루 맛사지 해드린 후 의자를 빼어 욕조 안으로 몸을 밀어 넣고 피로를 푸시면 된다.

아버지의 몸을 닦아 드리며 옆에서 잔심부름을 해 주는 할아버지 목욕 조수 아들 녀석을 쓱 보며 문득 드는 생각.
'내가 늙으면 우리 아들이 내게 이렇게 해줄까?'
이 부질없는 생각에 혼자서 웃음짓고 만다. '기대할걸 기대해야지'

아버지의 몸엔 과거 힘겨웠던 삶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다. 아버님의 어깨와 휜 등에 나무 옹이처럼 굳어진 깊고도 진한 지게자국. 고단한 삶을 등에 지고 살아오신 아버지, 이 굳어 옹이진 삶의 자국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다.
두 눈에 왈칵 쏟아질듯한 눈물이 고인다. 

무논에 개구리가 울어댈쯤, 못자리 하시러 성큼성큼 걸어 나가시던 모습, 뜨거운 여름날엔 소먹이로 벤 꼴을 한지게 베어 들어오셔서는 밀짚 모자에 담겨진 오디를 가슴에 안기며 "옛다"하시던 자상함,  마루에 걸터 앉아 풋고추에 고추장 찍어 찬밥을 물에 말아 드시며 새참을 즐기시던 천상의 농삿꾼, 아버지!

아버지의 목욕을 시켜드릴때는 반드시 아들녀석을 함께 데리고 한다. 이놈들이 나중에 자라 내게 효도까지 해주길 바라진 않아도 우리를 있게 한 할아버지의 넓고 큰 그늘,  그리고 세월이 가져다준 우리 삶의 뿌리와 연륜을 가르치고 싶어서다. 
아이의 눈을 본다. 아이의 눈빛에 할아버지의 고단한 삶과 여정, 그리고 감사한 마음이 있는지 본다. 그게 녀석의 삶과 장래에 대한 밑천이 되리라 믿는다. 

"아버지, 날도 뜨거운데 밀짚 모자 대신 멋쟁이 모자 하나 사드릴까요?" 
지난 여름에 슬쩍 농담을 드려본적 있다.
그러나 대답이 없으시다. 맘속으로 "씰데없는 소리" 하시는 표정이다. 그 표정속에서 이젠 밀짚모자조차 가까이 하지 않으시려는 만큼 늙으신것 같아 괜히 여쭈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가장 힘들다.  평생을 농삿일에 묻혀 자식들을 키우시며 강건하던 당신이었건만 이미 세월 앞에 허물어질것만 같이 늙으신 당신을 남겨두고 올라오는 아들은 가슴이 한없이 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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