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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설 선물, 작은 아버지의 찹쌀
2013-01-14 00:37:35최종 업데이트 : 2013-01-14 00:37:35 작성자 : 시민기자   최종훈
요즘 전화기는 말이 전화기지 사실상 컴퓨터에 가깝다.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건 이동통신망을 통해 네트워크와 연결해서 필요한 모든 데이터를 얻고 접속하고 메일과 자료를 주고 받으니 전화기는 곧 움직이는 컴퓨터가 되었다. 

이렇게 첨단화가 되다 보니 요즘 핸드폰에는 음성인식 기능이라는것까지 달렸다. 핸드폰을 열고 미리 입력된 이름을 발음하면 전화번호가 뜨고 통화버튼을 누르면 전화가 걸리는 기능이다. 심지어 요즘 고급 자동차 안에도 전화기가 블루투스로 연결이 되어 이런 보이스 컨트롤 기능이라는게 내장이 되어서 차 안에서 손을 한번정도만 까딱하면 곧바로 음성인식으로 통화가 되는 정도이다.

참 대단한 기술이 아닐수 없다.
하지만 약간 안타까운 부분은 도심의 소음이 워낙 심해서 기침을 몇 번 한 후 목소리를 가다듬고 똑똑히 발음해도 주변 소음 때문에 잘 안 되는 경우도 적잖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기능들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런 전화기를 쓰는 요즘 아이들에게 '딸딸이'를 물으면 시골에서 굴러 다니는 경운기냐고 물을법 하다.

소박한 설 선물, 작은 아버지의 찹쌀_1
소박한 설 선물, 작은 아버지의 찹쌀_1

삼사십년 전에 집에서 쓰던 전화기는 다이얼식이었다. 0부터 9까지의 전화번호를 빙그르르 돌려서 쓰는 방식이었다. 
당시에 전화기는 비싸기도 했거니와 전화를 놓고 사는 집도 적었고, 전화 사용료도 비싸다 보니 시외전화 한 통화 쓰려면 손이 다 떨렸다. 심지어 주인 몰래 외부인이 시외전화를 쓸까봐 0자 다이얼에는 자물통을 채워놓은 경우도 흔했다. 0자를 돌리지 못하면 시외전화를 쓸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고안한 것이었고, 전화기의 0자에 채우는 자물통이 따로 만들어져 팔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더 구형 전화기가 바로 이 딸딸이였다.
내가 살던 시골마을에서는 다이얼식 전화기가 보급되기 전에 몇 년동안 이 딸딸이가 마을 이장님댁에 설치가 되어 동네사람들이 거기에 가서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받기도 했다.
즉 서울로 돈 벌러 나간 문식이가 고향 이장님댁으로 전화를 걸어 "저유, 이장님. 향나무골 문식이유.  엄니좀 바꿔 주셔유"라고 하면 이장님은 득달간이 마이크를 틀어 "아, 아. 향나무골 문식이 엄니 전화받으러 오셔유. 큰아들 문식이 전화왔습니다"라고 생중계를 하게 되고 그 소리를 들은 문식이 엄마는 밥 짓던 손을 놓고 부리나케 이장님 댁으로 달려가 반가운 아들 목소리를 듣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이 딸딸이로 전화를 걸때는 어쩌는가.
전화를 걸때 나는 소리 때문에 전화기의 별명이 딸딸이가 된 것이다. 이 전화기는 전화통 오른쪽에 상대방에게 신호를 보낼때 쓰는 전기자극용 손잡이가 있고 그 손잡이를 잡고 마구 돌리면 "따르르륵, 따르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딸딸이가 되었는데 그렇게 하면 읍내 전신전화국에서 일하는 여성 교환수가 받아 "여보세요. 어디 바꿔 드릴까요?"이렇게 묻는다. 여기에 전화번호를 알려준 뒤 기다리면 상대방이 연결되는 식이었다.
이때 발음이 시원치 않아도, 심지어 정확한 이름을 몰라도 대개 교환수들은 척척 알아듣고 신기하게 잘도 연결해 준다.

작은아버지가 일찍이 도시로 나가 사업을 하셨다. 손에 땟물이 끼어 시커멓게 되도록 노력하신 끝에 당시에는 꽤 크게 시멘트와 페인트를 파는 건설자재 가게를 하셨다. 그때 우리는 페인트를 뼁끼라고 불렀다. 페인트 칠도 뼁끼칠이라고 했으니까.

매년 설날을 앞두고는 작은아버지는 자식들과 함께 찹쌀 30키로씩을 포대에 담아 선물로 돌리셨다. 작은아버지는 아예 고향에서 찹쌀 농사를 지은 고향 친지들에게 갓 방아를 찧어 낸 찹쌀을 잔뜩 사 들여 트럭에 싣고 온 다음 그것을 군청, 경찰서, 소방서 같은 곳에 돌렸다.  이건 뇌물이라기 보다는 사업을 하시다 보니 그런 곳에 설날을 맞아 감사의 뜻으로 나눠 먹기 위해 그러셨던 것이다.

그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읍내 전신전화국의 전화교환수 누님들이었다. 1년 내내 고생한 그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작은아버지는 찹쌀 한 포에 담아 돌리셨던 것이다. 

언젠가 내가 작은 아버지댁에 놀러갔을 때도 마침 그 감사의 인사를 드리던 때였다. 작은아버지는 사촌형들과 함께 내게도 그 일을 맡기셨다.
사촌형들과 함께 발이 페달 끝까지 닿지 않는 육중한 짐 자전거에 찹쌀을 싣고 나가 쌀을 돌리곤 했는데 그땐 겨울이 지금과 달리 길고 응달진 곳은 내린 눈이 녹지 않아, 가로등도 없는 어둑한 골목길에서 기우뚱거리다 넘어지기를 몇번씩이나 반복해야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잠 소박한 설 명절 선물이었고 순수하기 그지 없는 선물이었다.
찹쌀이라고 해봤자 30키로짜리 한포대. 그리고 그것도 소위 경찰서장이나 소방서장 같은 높은 분들에게 드리는게 아니라 경찰서 말단 직원, 전화 교환수, 군청 수위아저씨 같은 분들에게 돌리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으니 그보다 더 순수할수는 없었다.

이제 올해 설도 한달도 채 안남았다.  해마다 겨울철, 설날이 다가올 때마다 어릴적에 작은아버지의 찹쌀 나눠 먹기 행사가 자꾸만 떠오른다. 나도 이번 설에는 별로 가진건 없지만, 나보다 좀 어려운 이웃을 찾아 조금이라도 나눠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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