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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했던 퇴근길
2013-02-06 02:53:40최종 업데이트 : 2013-02-06 02:53:40 작성자 : 시민기자   이영희

훈훈했던 퇴근길_1
훈훈했던 퇴근길_1

퇴근길이었다. 눈이 와서 미끄럽고 날씨도 갑자기 추워져서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버스를 탔다.
막 퇴근시간이어서 사람들도 저마다 몸을 움츠리고 손을 호호 불면서 버스에 올랐다. 대개가 다 그렇듯이 아주 춥거나 아주 더울때 사람들은 남들 돌아볼 여유 없이 당장 내몸 시원하거나 따스하게 하는데 신경을 쓸 뿐이다.

버스에 타자마자 공간이 조금 있는 의자 옆으로 가서 섰다. 버스 천장에 붙어있는 안전 손잡이를 잡고 창밖 야경이나 감상하며 갈 생각으로 이제 막 여유있게 한숨 돌리는 동안 버스는 벌써 다음 정류장에 다다라 정차한 뒤 그곳 승객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올라 타는거야 큰 관심 두지 않고 창 밖을 보고 있는 찰나,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가 쫑긋 섰다.
 
'삑' 소리가 나면서 '잔액이 부족합니다'라는 음성이 흘러나온 것이다. 
누군가가 실수로 잔액 충전 하는 것을 까먹었으려니 하면서 무심코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봤더니 한 할아버지가 그 소리에 놀라 엉거주춤 서 있는게 보였다. 
할아버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석고처럼 굳어져 서 버렸고 더 이상 발을 떼어 앞으로 들어오거나, 그렇다고 밖으로 다시 내려가지도 못하신채 그대로 선 것이다.

뒤에서는 할아버지를 살짝 밀치며 사람들이 계속 올랐다. 날씨도 춥고 서둘러 귀가해 집에서 따스한 아랫목에 몸을 녹이고 싶으니 버스 안에서 일어난 할아버지의 상황과는 아랑곳 없이 승객들이 계속 오른 것이다.
하지만 타야 할 사람이 많은 상태에서 출입구를 막아 선채 엉거주춤 서 있는 할아버지 때문에 뒤에 오르던 승객들이 불편을 겪자 운전기사 아저씨가 "할아버지, 안으로 좀 들어오세요"라며 안내를 했다.

그제서야 할아버지는 멋쩍은 자세로 몇발짝 떼어 앞으로 들어서셨다. 운전기사님 역시 할아버지가 그럴수도 있으려니 싶었는지 삑 소리와 함께 들린 잔액부족 멘트에 크게 괘념치 않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여전히 불안한 자세로 카드를 대는 승차입구를 연신 바라보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전이나 지폐가 없으신듯 했다.

결국 할아버지는 난처해 하는 표정을 지었고 운전기사님에게 "어이구,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다음에 꼭 낼께요"라시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기사님은 "괜찮아요 할아버지, 그냥 앉아서 가세요"라며 배려를 해 드렸다.

그때 마침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젊은 남학생이 선뜻 1000원을 꺼내 할아버지께 드리며 "이걸로 요금 내세요. 그리고 혹시 다음 차 갈아타시게 되면 이걸로 내세요"라며 드리는게 아닌가.
그 말을 듣고 유심히 보니 학생은 할아버지께 1000원이 아니라 2000원을 드렸다.
2000원이라는 돈의 액수야 요즘 초등학생들 껌값밖에 안되는거지만 그 순간에 구경만 하고 있었던 나와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대학생이 할아버지께 돈을 드릴때에서야 비로소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지?' 라는 생각과 함께 '저 학생은 당장의 차비만 드린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혹시 다른 버스를 또 갈아 타실지도 몰라 그것까지 챙겨서 드리는 구나' 하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아 쓰는 처지이거나, 공부할 시간을 쪼개어 밤잠 덜 자면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이기에 본인도 주머니 시정이 넉넉하지는 않을텐데...

그렇게 빠듯한 주머니 사정인 학생보다는 그래도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버는 나는 훨씬 더 여유로운데도 불구하고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어이구, 이런걸 뭘... 학생이. 내가 이걸 받아도 되나? 하여튼 고맙네 젊은사람"이라며 감사의 뜻을 표하셨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이 그 뒤에 벌어졌다.
어느 중년의 아저씨가 대학생에게 "학생. 이거 받아. 참 착하네. 누구 아들인지... 이걸로 책 사봐"라며 돈을 건네는게 아닌가. 만원짜리였는데 한 장인지 두장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분명히 만원짜리는 확실했다.
학생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이 남자분은 받으라며 학생의 주머니에 꾹 찔러 넣어주고는 버스가 정차하자마자 곧바로 하차했다.

얼떨결에 돈을 받은 대학생. 어찌할바를 몰라 했으나 참 보기 좋았다. 생각 있는 젊은이와 중년의 신사. 
학생은 작은아버지뻘쯤 되 보이는 중년의 신사로부터 다가올 설날에 세뱃돈 미리 받았다고 생각하면 좋을것 같다. 날씨와는 딴판으로 참 훈훈한 퇴근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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