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고향에서 돼지 키우던 소년의 추억 일기
2013-02-07 00:22:27최종 업데이트 : 2013-02-07 00:22:27 작성자 : 시민기자   홍명호
"너, 이번에 시골 갈 때 숯불 바베큐 하는 그릴 좀 가져가라"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설 명절 연휴에 바베큐 그릴좀 들고 가라는 당부였다. 
"왜요? 고기 구워 드시게요?"
"응. 아버지 돼지고기 좋아하시잖아. 소고기는 질겨서 싫어하시고. 네가 가지고 있는 그릴로 구우니까 맛있더라"
"그러죠 뭐. 어려운거 아닌데"

지난 추석때 가족들이 시골에 모였을때 내가 가지고 있던 바베큐 그릴로 돼지고기 훈제 숯불구이를 했더니만 온 가족들이 다같이 맛있게 먹었던 적이 있었는데 형님이 그걸 기억해 내어 이번 설에도 차에 싣고 오라는 이야기였다.
"고기는 제가 사 갈께요"
"아냐. 돼지는 동네 석호형네 집에서 기르던거 직접 잡는댄다. 아버지가 좀 사 놓으신다고 했으니까 그거 구워먹으면 될거야"
고향 마을에서 직접 돼지를 잡는다는 말이었다. 해마다 명절만 되면 돼지를 잡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럴 모양이었다.

형님과 다가올 설날 돼지고기 구워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맛이 다셔진다. 집에서 돼지고기 사서 먹는거야 뭐 어려우랴만, 온 가족이 시골집에 모여 장작으로 직접 숯불을 만든 다음 거기에 갖은 양념으로 숙성을 시킨 토종 돼지고기를 구워 먹는 맛은 도시에서 삼겹살 구워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시골 사라들만이 느끼는 행복감이랄까.

어릴적에 고향에서 자랄때는 온 마을 가정마다 전부 돼지는 서너마리씩 기본으로 키웠다.
소 한 마리에 돼지 서너마리. 밥 먹고 난 부산물과 농촌 들판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풀을 베어다 먹이면 되니 지금같이 사료를 먹일 일도 없었고 사료값 걱정할 일도 물론 없었다.

 
고향에서 돼지 키우던 소년의 추억 일기_1
고향에서 돼지 키우던 소년의 추억 일기_1

우리 집에도 돼지가 있었다.
"형아야, 돼지... 돼지 새끼 죽어.... 빨랑 와. 빨리!" 
어릴적 아주 오래전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날. 그때 중학교 1학년이던 내 밑에 초등학교 다니던 동생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아 가던 나를 향해 저만치 집 바깥마당에 만들어진 돼지우리 앞에서 동생이 나를 발견하고는 목청을 높혀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게 보였다. 멀리서 설핏 들으니 돼지가, 돼지 새끼가 죽는다는 외침이었다.

돼지가? 앗차, 그러고 보니 돼지새끼 낳을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퍼뜩 스쳐갔다. 그때 시골에서 중학교 1학년이면 반은 농삿꾼이었다. 웬만한 농삿일 다 거들어 드렸고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풀을 베어 소 돼지에게 먹이는 일은 기본중 기본이었다.
그런데 엄마 아버지는 어디에 가시고 어린 동생이 저리 난리지?

자전거에 가속을 붙여 달려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동생은 돼지우리를 가르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침에 일하러 가시면서 돼지 새끼 날지 모르니 잘 보라고 했는데... 4마리가 죽었어. 잉~잉. 히이잉." 
땅바닥에 주저앉아 슬피 우는 동생녀석.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생인 나 조차도 돼지가 새끼를 낳을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라 우왕좌왕 했을텐데 초등학생 아이가 그 상황에 맞닥뜨려 새끼 돼지가 죽는걸 눈앞에서 보노라니 어린마음에 발만 동동 구르며 얼마나 속이 상하고 안타까웠을까. 

당시에 큰 누님은 서울로 돈 벌러 가 있었고, 고등학교 다니던 형님은 읍내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기에 집에 없었다. 아버지는 들일을 나가신듯 했고, 엄마는 봄방학을 맞이해 집에 있던 동생에게 뒷일을 맡기고 남의 집에 품을 팔러 가신듯 했다. 철없는 막내 여동생은 돼지새끼 낳는데 아무런 도움이 될수 없었고.

어쨌거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끼 돼지 4마리가 죽고 나머지 6마리가 살아있었다. 
우선 급한 마음에 나도 평소때 봐둔 기억은 있어서 얼른 집안으로 달려가 걸레로 쓰려고 마루 한편에 놓아둔 내복 자락을 뭉쳐 가지고 나왔다. 

돼지 우리 안으로 들어가 동생이 새끼 돼지를 잡고 내가 내복 천으로 양수로 뒤덮인 돼지 새끼를 정성스레 닦아 어미의 젖에 물렸다. 지금 생각컨데 나도 참 대견했다. 얼른 그런 판단이 섰고 서둘러 6마리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돼지를 닦아 어미의 젖에 물릴 생각을 했다니.

하여튼 6마리를 살리느라 온 몸에서 식은 땀이 주르륵 흘렀고 동생과 나의 손은 새끼 돼지로부터 묻은 피와 탯줄, 끈적이는 점액질 같은 양수 그런게 덕지덕지 묻어 그야말로 흥건했다.
그나마 6마리라도 살린게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동생은 제녀석의 잘못으로 나머지 4마리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여전히 낯빛이 어둡고 울먹거렸다.
"괜찮어, 괜찮어,... 나머지 6마리 살렸잖여. 엄마 아부지도 잘했다고 하실겨"

농사철이 다가오던 2월말이니 아버지는 하실 일이 많아 들판으로 나가셨고, 모든 농삿일 준비와 집안일을 혼자 감당하시던 엄마도 한푼이라도 벌기 위해 잠깐 집을 비운 사이 예상치 못하게 돼지가 새끼를 낳게 된거고, 동생이 그걸 발견하고는 어쩌지를 못해 발만 동동 구르던중 내가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이다.

돼지가 새낄 낳는 급한 상황이었지만 동네 어른들조차도 죄다 들로 일을 나가신 상태라 도움을 받기 어려웠으니, 어린 동생의 마음이 얼마나 탔을지 짐작이 되어 내가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어서야 돌아오신 엄마와 아버지. 낮에 일이 일어난 얘기를 듣고서는 아우의 볼을 쓰다듬어 주시며 "어린것이 맘고생 했구나. 그래도 너와 늬 성이(형이) 서둘러서 6마리라도 살렸응께 잘 혔다. 잘 혔어. 안그랬으믄 돼지새끼 죄다 죽일뻔 한겨. 잘혔어"라며 막내아들을 위로해 주셨다.

우리는 그날 저녁, 안타깝게 죽은 새끼 돼지 4마리를 집 밖 산비탈에 가져다 정성껏 묻어주었다. 하늘나라에 가서 맛있는거 많이 먹고 잘 자라라며.
그래도 저녁식사를 마친 뒤까지 동생은 그 4마리한테 미안한지 밥도 안 먹고 이불을 덮어쓴채 아무 말도 안했다. 
비록 시골에 살았지만 어려운 가운데 엄마와 아버지가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고생한지 다 아는 철이 든 동생이었다. 아마도 동생의 마음엔 하루 품삯 벌기위해 엄마는 일하러 갔는데, 제 자신이 집에서 엄마의 품삯보다 몇십배를 까 먹었다는 생각에 죄스러워서 우는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우리집에는 그때 돼지가 5마리 있었는데 이녀석들이 돌아가면서 새끼를 낳았고 그걸 잘 키워 읍내에 내다 팔아 우리 학비와 학용품 사는데 큰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지금이야 몇십마리 몇백마리씩 전문 양돈농가가 사료를 먹여 돼지를 키우지만 그때는 가정에서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 먹여 키웠으니 사료값 같은건 크게 들지 않았다. 

우리 형제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돼지에게 풀도 베어다 주고, 남의 집 감자나 고구마 캔 뒷 끝에 그 밭에 소쿠리와 망태를 들고 가서 호미에 찍혀 못쓰게 된 그것, 작아서 버린것 까지 죄다 긁어모아 돼지의 양식으로 썼다.
심지어 여름철에는 근처 냇가와 강으로 가서 낚시질로 잡은 붕어를 가져다가 삶아서 먹이기까지 했다. 이럴때 돼지에게는 특보양식이었다. 어린 아들들의 이런 지극정성을 알았기기에 엄마도 우리 형제를 항상 대견해 하셨다. 

덕분에 가족 모두 지금 장성한 어른이 되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고향의 부모님도 건강하시고.
우리 가족에게 돼지는 가족이었고, 가정을 일구어준 보배였다.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