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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길을 걸으며 만들어 낸 스스로의 감동
존중으로 소통하면 감동이 만들어진다
2013-02-07 03:39:06최종 업데이트 : 2013-02-07 03:39:06 작성자 : 시민기자   유병화

어제 새벽 선잠을 깼는데 창밖을 보니 또 눈이 내렸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생활의 변화 같은 것에 일희일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아직도 가까이에서 돌아가는 상황 이런저런 일을 보면서 신경이 쓰이고 이목구비가 번거로와진다. 

새벽길을 걸으며 만들어 낸 스스로의 감동_1
새벽길을 걸으며 만들어 낸 스스로의 감동_1

여전히 철이 덜 든것일까. 아니면 나이를 헛 먹은걸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더니 괜스레 추스릴 일들만 더 늘어나는 것 같다.  단순해지고 가볍게 살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어젯밤에도 새벽에 잠을 일찍 깬 이유는 집안 선산에 오래전 고향을 떠났던 8촌쯤 되는 친척 어르신이 당신의 아버님을 고향땅에 모시고 싶다며 선산 한켠의 자리를 요청했는데 그 문제로 최근에 종친들간에 옥신각신 말들이 좀 많았다.
일가친척을 위해 한 일도 하나도 없는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고향을 떠나 아무 연락도 없다가 세상을 뜨자 그 자손이 뒤늦게 고향 선산에 묻어 드리고 싶다고 나타난 것은 받아들일수 없다는 원칙론이 강했다.

하지만 온건파 쪽에서는 그 분이 고향을 떠난 이유가 가난하기만 했던 농촌 마을에서 비전이 안보여 7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그런 것이니 이제라도 고향이 그리워 돌아오겠다는 것을 막아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냈다.
어쨌거나 그 일로 이번에 설날 내려가면 다시금 논쟁이 있을것 같은데, 나이를 먹으니 그런 일에까지 의견을 내는 것도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결국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는게 맞는 말인것 같다.
그렇게 집안 종중 일에 여러 가지 일로 뒤척이다 자정 넘어 잠이 들었었는데 누군가 조잘대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참새들이다. 
아이들이 실수로 맞춰 놓은 자명종 시계의 참새소리. 잠결에 자명종의 참새소리에 잠을 깨어 스위치를 끄겠노라며 일어나 불을 켜는 순간 그 짧은 1분동안에 잠이 저 멀리 평택까지 달아나 버렸다.

밖은 지금 새벽인가 싶어 창문을 열었더니, 이게 웬일. 창 밖 나뭇가지에서 진짜 참새 여러마리가 앉아 짹짹 거리며 조잘대는게 아닌가. 
우연 치고는 참 별일이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싶을 정도로.

혼자 피식 웃으며 한동안 참새들이 노니는 것을 보다가 창문을 닫고 보니 시골에서 겨울철에 장닭이 새벽을 알리는 목소리를 내던 일이 떠올랐다.
초가집 부뚜막 횃대에서 '꼬끼오'새벽을 알리면 이 집 저 집에서 나도 질세라 기찬 장닭들이 길게 목을 꺾으며 앞다투어 새벽을 열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정경은 추억에서나 만날까, 그 추억을 이젠 조잘조잘 참새들이 대신하고 있다. 

창 밖은 아직 어스름 여명인데 모자란 잠을 청할까 하다가 저들이 쉴새 없이 재촉하는 바람에 결국 두툼한 잠바를 걸쳐 입고 집 밖으로 내려섰다. 
내친 김에 아침운동을 할 요량으로 슬슬 걸음을 걸었다. 눈 쌓인 도심의 새벽. 
수원의 아침을 여는건 참새만이 아니다. 부지런한 우유배달 아줌마들은 눈길에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이집 저집을 드나든다. 신문배달 직원도 마찬가지고 새벽부터 문을 여는 수퍼마켓, 그 시간에 출근하는 샐러리맨들도 있다.

저마다 제각각의 삶의 길이 있다. 각자 자기 길로 최선을 다해 걷고 뛰며 심호흡을 가다듬는다.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옛 친척 어르신도 그 후손인 지금의 아들들이 아버지 어머니가 결국에 안식처로 삼고 싶어하는 길이 바로 당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란걸 알기에 어렵사리 말을 꺼낸 것이리라.

산다는 것은 늘 상대방과의 커뮤니케이션이고 요즘 말로는 소통이라 한다. 소통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 아닐까.
상대방이 나의 의견을 잘 들어주고 받아들이게 하려면 나도 상대방 의견을 존중하며 귀담아 경청하는 태도가 필수이다. 서로의 그런 마음이 교감을 이룰때 존중이 되며 소통이 되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에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어쩔수 없이 정든 고향을 등져야만 했던 그 8촌쯤의 친척 어르신을 이해한다. 덕분에 그 후손들이 잘 컸고 훌륭한 사람들이 되었다.
기나긴 인생의 여정에서 어떤 판단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판단 역시 누구에게 해를 끼치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분들이 이제 고향을 안식처 삼아 영원히 편히 쉬게 해드리는 것도 지금 그래도 생각 있는 사람의 도리 아닐까 한다. 그 친척 어른의 요청을 받아들이는게 존중이고 소통일 것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고, 결국 알고 보면 우리와 함께 피를 나눈 가까운 일가 친척이 고향으로 오고싶어하는 것을 막는것은 참으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어떻든 눈 내리는 도시의 새벽길을 걸으며 그렇게 생각을 정리해 보니 가슴이 넉넉해지는 느낌이 든다. 

문제는 항상 마음의 여유다.  여유를 좀 갖자. 법정스님은 버림으로써 더 크게 얻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무나 그 위에 쌓인 눈, 멀리서 빌딩 숲을 돌아 예까지 건너 불어오는 미풍, 떠오르는 태양, 이런 자연과도 대화하면서 여유를 가짐으로써 삶을 풍성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누구든지 다 받아줄것 같은 넉넉함이 덩달아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통하고 진정으로 여유를 나눌수 있는 자만이 스스로 감동도 만들어 낼수 있는것 같다. 새벽길을 걸으며 나만의 감동을 만들어 냈으니 내 인생살이의 수명도 약 3일쯤 더 늘어났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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