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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으로 세상을 뜬 이주노동자 치링 타망과 그의 아우
네팔 대지진 이어지는 한국이주노동자들에 사연
2015-05-17 22:55:20최종 업데이트 : 2015-05-17 22:55:20 작성자 : 시민기자   김형효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신분을 당당히 밝히지 못하고 사는 것처럼 고통스런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지위고하와 관련된 것이어서가 아니라 국적과 인종에 따라 파생되는 차별적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천재지변에 의해 일어난 이번 네팔대지진 이후 전해지는 한국출신 네팔이주노동자들에 사연은 더욱 더 슬프기만 하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온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그 중 8년 정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한국의 노동 현장 곳곳을 누비던 한 이주노동자가 있었다. 그는 6개월 전 불법한 이주노동자 신분을 벗고 멋진 가장이 되어 고국인 네팔을 찾아 금의환향하였다. 그의 나이 39세, 그는 고향인 랑탕히말라야 인근 러슈와에서 카트만두 인근 다딩 마을 처녀와 결혼하여 몇 해를 살다가 한국인력 송출업체를 통해 이주노동을 시작했다. 

그때 나이 31세 결혼 한 지 얼마 안되어 아이를 가졌다. 그는 당시 11개월된 아들과 23살 어린신부를 두고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의 아들과 부인, 그리고 아우 가족을 모두 만나서 인사를 전하고 가족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때 내가 쓴 네팔어린이를 위한 동화책을 가지고 갔었다. 치링 타망을 대신해서 내가 그의 아들 써친에게 인사를 전한 것은 7년만이었다.

지진으로 세상을 뜬 이주노동자 치링 타망과 그의 아우_1
치링 타망의 어린아들 써친 타망과 그가 막 결혼했을 당시의 사진이다.

지진으로 세상을 뜬 이주노동자 치링 타망과 그의 아우_2
내가 치링 타망의 부탁으로 그의 가족이 사는 다딩에 갔을 때 동네 아이들과 마을 구경을 할 때다. 사진 아래는 그의 동생 부부와 어린 조카들 그리고 치링에 아내와 써친 타망이다.

그런 그와 내가 만난 것은 수원에 한 네팔상점에서다. 그리고 그와 나는 나의 시골집에도 함께 가서 머물기도 했고 나중에 몇 년 소식이 없다가 페이스북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돌아온 후 내가 네팔에 가고 네팔인 아내와 결혼하여 살게 되었을 때 그는 내게 자신에 가족이 있는 곳을 한 번 가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조금에 거리낌도 없이 그의 집을 찾아갔다. 한 아이와 막 짓고 있는 집, 1층은 이미 완성된 집이었고 2층은 모든 구조물이 들어선 채 내부공사만 마치면 되는 집이었다. 그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이웃해 살고 있던 그의 아우와 아우의 가족은 매우 단란해 보였다. 
치링 타망의 아우는 인근 군부대에서 직업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었고 네 자녀를 두고 있었다. 이후 나는 가족처럼 오가며 지냈다. 물론 치링 타망의 아우도 가끔 집에서 만든 네팔 전통주 럭시(알콜40도)를 배달하기도 하며 딸과 아들을 데리고 카트만두에 우리집을 찾아오고는 했다.

그런 형제가 이번 지진으로 함께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야말로 참사다. 물론 지금 네팔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사연이 넘친다. 8년 노동의 훈장을 받아 안고 집을 짓고 아우는 직업 군인을 그만두고 형인 치링 타망과 고향의 수력발전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지진 발생일인 지난 4월 25일에 둘은 아침 출근길이었다고 한다. 랑탕히말라야에서 발생한 지진은 랑탕마을을 모두 삼켜버렸고 이 형제와 가족의 꿈도 통째로 삼켜버린 것이다. 

나는 비보를 접한 지난 15일 아침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멍한 채로 지냈다. 물론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다딩(카트만두 1시간 30분 거리)에도 참혹한 지진이 발생하였다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하고 있었던 나는 그의 가족이 무사할까 노심초사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발행되는 네팔인 인터넷 신문을 보고 아내가 아침 출근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소식을 듣고 난 곧 다딩에 살고 있는 치링 타망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지진으로 세상을 뜬 이주노동자 치링 타망과 그의 아우_3
사진 중간에 써친 타망이 집 앞에서 놀고 있다. 사진 위는 수원 화성여행 중이고 사진 맨 아래는 여전히 살아있는 페이스북 계정 속에 행복한 부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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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기도했을까? 수원 화성 여행 중 홀로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치링 타망이다. 지난 해 8월 네팔인 친구들과 함께 칠곡에서 온 그를 수원 화성을 구경시켜 주었다. 나의 아내와 네팔 친구들

사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기대하며 기다리던 그의 안부를 알고는 그제야 직접 안부를 묻게 된 것이다. 치링 타망의 형제 말고 그의 가족은 모두 무사했다. 두 가족 모두 가장을 잃었다. 그의 집은 다딩의 중심지와 떨어져 있어 당초 알려진 뉴스에 중심과 멀었다. 다행이면서도 형제의 죽음은 충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와 나는 지난해 8월 수원에서 만나 네팔에서 나에게 한국어를 배운 학생과 함께 수원 화성을 구경했다. 

이미 그때 그는 곧 네팔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살겠다는 뜻을 전했고 나는 그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가라고 당부하며 수원 화성을 구경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귀국한 그는 가끔 아내와 아들의 사진을 함께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하고 행복한 일상을 사는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불과 6개월 동안에 꿈이 무너진 그의 아내는 내가 전화로 안부를 묻자. 짧은 말로 "지진으로 갔어요."라고 매우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무심한 하늘이여. 살아남은 가족들은 어찌하라고, 아침부터 접한 부고에 눈물을 흘리며 멍청하게 보내고 있다. 지진 후 수많은 노동자와 이주민 가족들에 집들은 부서져 내렸고 기간을 달리한 이주노동자들의 금의환향 꿈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한 사람 두 사람 그들에 사연을 일일이 정리할 수 없는 것은 처음 듣는 사연이 안타깝다가 더없이 더해지는 안타까운 소식에 이제는 집이 무너진 사람의 사연은 별일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안타깝게도 여진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토요일(16일) 낮에도 두 차례의 여진이 있었고 17일 일요일 아침에도 다시 한 차례의 여진이 있었다. 지금까지 방송에서 알려진 4~50회의 여진이 아니라 230회 이상의 여진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네팔인들은 모두 침통함 속에 평범한 일상으로의 복귀를(Come Back To Normal Life!)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제 그들에 기도문구가 되어버린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를!" 우리는 과연 감사하고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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