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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특집】 노병은 죽지 않고 나라 걱정한다
중학교 재학중 학도병으로 군에 입대, 중공군에게 잡혀…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 참전용사
2019-06-24 16:08:42최종 업데이트 : 2019-07-12 10:51:30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중공군 포로가돼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이우인 참전용사

중공군 포로가돼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 이우인 참전용사

내일(25일)이면 6.25가 발발한지 69년째 되는 날이다. 6.25 전쟁은 신생국가 대한민국을 완전 폐허로 만들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우리군이 13만7899명이, 유엔군은 4만790명이 전사했다. 10여만명의 부상자도 발생했다. 민간인 피해는 학살 폭격 등으로 60여만명이 사망하고  부상자등 희생자 수는 100여만명으로 추정한다. 북한도 150여만명으로 추정한다. 그렇게 많은 희생이 따랐는데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채 세계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 매년 돌아오는 6.25때면 희생자들의 유가족들 가슴을 쓰러내리게 한다.

 

e수원뉴스는 참혹했던  6.25를 상기하고 국가 안보를 고취 시키기 위해 호국참전 용사들의 전쟁 영웅담이나 그 후손들의 삶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6.25 참전용사 전쟁 영웅담과  6.25 전쟁과  관련된 시민기자들이 취재한 기획기사들이 속속 보도되고 있다. 기자도 수소문 끝에 친지의 소개로 어렵게 6.25 참전용사를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중학교 재학중 학도병으로 군에 입대

23일 일요일 오전 10시반 참전용사 이우인(88)씨가 다니는 00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보고 나오는 이씨를 만나 교회 휴게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안녕하십니까  e수원뉴스 시민기자 000입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e수원뉴스에서는 생존하신 6.25 참전용사들의 전쟁 영웅담을 기록으로 남겨 6.25 전쟁을 모르고 자란 후손들에게 6.25의 참상을 알려 안보의식을  고취시키려고 합니다. 참전 당시의 전황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우인 씨는 흔쾌히 허락을 한다. 경기도 화성시 기안동에 거주하는 이우인 씨는 1950년 6.25가 발발 하던 해 서울 중동중학교 5학년(지금의고2년)에 재학중 이었다. 그해 10월 17일 비원(秘苑)으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나갔더니 모인 사람들을 모두 기차 화물칸에 싣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내려보니 대구라고 한다. 열차에서 내려 일행은 대구 농과대학으로 갔다. 당시 나이 18세로 군대갈 나이도 아닌데 학도병으로 군대에 끌려온 것이다.

 

이우인 씨는 대구 농과대학에서 2주간 기관총 사격 훈련을 받고 일본제 도요타 트럭에 실려 강원도 횡성 국민학교에 도착했다. 횡성으로 가는 도중에 피난민들을 만났다. 피난민들은 한국군을 보더니 우리가 개선장군이라도 되는것 처럼 손을 흔들며 환영을 해준다. 이우인 씨는 18살 나이에 무명의 학도병이 아니라 군번까지 받은 당당한 군인이 되어 3사단 22연대에 배치되었다. 그해 12월21일 강원도에는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무릎 까지 빠져서 걷기도 어렸다.


중공군 포로가돼 구사일생으로 탈출


그런 상황에서 514고지에서 중공군과  교전이 시작됐다. 평생 처음으로 전쟁과 맞닥뜨린 이우인 씨는 요즘 군대 같은 방한복도 없이 영하의 날씨로 추워서 몸은 꽁꽁 얼어붙고 어린 나이에 얼마나 무섭고 겁이 나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살아있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한다. 그들에 비해 아군은 전력도 부족한데다가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밀려오는 중공군에 맞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강원도 횡성과 충북 제천을 방어하던 부대들이 중공군에 완전 포위됐다. 아군은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강원도 원산까지 끌려갔다.

 

며칠을 밥이란걸 먹어 보지도 못했다. "그때 어린 나이에 춥고 배고프던 생각을 하면..." 이라면서 눈시울을 붉힌다. 전쟁의 포화속에 얼마나 춥고 배고프고 고생을 했으면 69년이 지나 18세 소년이 90객 노인이 되었는데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질까 상상이 간다. 이우인 씨는 포로로 원산에 잡혀 있다가 5명이 탈출을 시도 했다. 탈출도중 1명이 중공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4명이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이우인 씨는 탈출해 살아 왔지만 소속 부대가 없으니 다시 대구 제1보충대로 이송돼 부대 배치 대기를 하고 있었다. 이우인 씨는 학교를 다니다 학도병으로 입대를 했고 글씨를 잘쓴 덕분에 육군본부 US 인사과로 부대를 재배치 받았다. 이 씨는 경기도 고양군 봉일천에 주둔한 미8군사령부 24사단으로 카츄사(한국군이 미군과 함께 근무)를 보내는 인사 담당을 맡았다. 육군본부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1953년 7월28일 휴전이 되었다. 1955년 7월까지 5년간 군복무를 하고 제대를 했다. 제대 후에는 23살 나이로 다시 학교에 들어가 졸업을 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 공무원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우인 씨는 머리가 희긋희긋한 기자의 나이를 묻는다. 나이를 말했더니 그럼 6.25 전쟁의 참혹함은 경험했겠구만요 한다. 13살때 6.25가 발발했으니 고향에서 보고 듣고 일어난 잔혹 했던 사건들은 다 기억한다고 했다. 이우인 씨는 "요즘 젊은이들은 6.25전쟁을 경험을 했나요", "전쟁의 참혹함을 알기나 하나요", "안보의식이 없는것 같다"면서 걱정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젊은이들에게 6.25 전쟁 참상을 널리 알려 안보의식을 깨우치게 해달라고 오히려 기자에게 당부를 한다.

 

"노병은 죽지않고 사라진다." 미국 맥아더 장군이 의회 증언에서 예편을 앞두고 한 말이다. 한국의 '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나라 걱정을 한다' 그런데도 일부 젊은이들은 안보 불감증이다. 심지어는 신앙(여호와의 증인)을 이유로 국민의 3 대 의무인 병역의무를 기피하는 젊은이들도 있다. 유죄를 줘도 부족한 판에 무죄를 주는 법관들도 있다. 중동의 작은나라 이스라엘은 '나라는 국민의 단합된 힘과 강인한 정신력과 군사력으로 지켜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준전시 상태다. 주변정세가 예측 불가하다. 이런 때 일수록 국민의 단합된 힘을 모아야 하는데 정치권과 사회단체들은 '좌파'다 '우파'다 '진보'다 '보수'다 하며 사분오열되고 자중지란을 하고 있다. 6.25와 같은 참혹한 전쟁을 억제 시키려면 선혈들의 호국정신과 희생으로 지켜진 대한민국 역사의 교훈을 모든 국민들은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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