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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깃든 융건릉
죽어서도 아버지와 함께하고 싶은 소망을 이루다
2021-04-20 11:04:30최종 업데이트 : 2021-04-20 15:57:32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융릉.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혜경궁 홍 씨)의 합장릉. 융릉은 묘에서 원으로 다시 능이 됐다.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왕릉의 3대 분류를 다 겪었다. 무덤의 주인만큼 무덤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쳤다.

융릉.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혜경궁 홍 씨)의 합장릉. 융릉은 묘에서 원으로 다시 능이 됐다.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왕릉의 3대 분류를 다 겪었다. 무덤의 주인만큼 무덤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쳤다.


 5월은 그 자체만으로 풍요롭다. 온갖 식물이 겨울을 이기고 봄 햇살에 생명력이 넘친다. 우리 일상도 5일은 어린이날, 8일은 어버이날이 있다. 가족끼리 넉넉하게 나눌 사랑이 기대된다.  5월을 문턱에 두고, 융건릉에 갔다. 왕릉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새소리와 풀냄새가 먼저 반긴다. 나이를 알 수 거목들도 모든 것을 넉넉하게 안아줄 듯하다.

왕릉은 국왕과 왕후의 무덤이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관련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그중에 융건릉은 진짜 이야기가 많다. 이야기뿐인가. 무덤을 보는 순간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둥근 무덤의 능선이 사도세자의 굴곡진 삶처럼 애틋하게 다가온다. 건릉도 아들 정조가 아버지를 향해 엎디어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어린이에게 아버지는 우주의 중심이다.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시작해 아버지와 함께한다. 아버지는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는 것만으로 존경의 대상이다. 특히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생활에서는 아버지의 역할이 크다. 어린아이는 아버지를 따르고 기대면서 안정적으로 성장한다. 

왕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린 정조의 아버지는 당시 세자 자리에 있었다. 장차 임금으로 오를 분이다. 이미 권위도 높고, 함부로 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할아버지 영조에게도 귀한 아들이었다. 영조가 장남 효장세자를 잃고, 42세에 얻었다. 막 돌이 지난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한대서,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다.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했다. 이 때문에 영조는 세자를 무척이나 총애했다. 영조는 아들에 대한 기대도 컸다. 그러면서 혹독하게 가르쳤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자연 기대에 못 미치자 질책이 많아졌다. 급기야 영조는 아들을 정서적으로 학대했다. 세자는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고 갖은 비행을 저질렀다. 이런 상황에서 부자간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1762년,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최극단에 달했다. 영조는 세자를 폐서인하며, 뒤주 속에 가두어 버렸다. 뒤주 속에서 세자는 8일 만에 생을 마감했다. 세자 나이 28살이었다. 이 일을 임오년에 일어났다고 해 임오화변이라고 한다. 

 영조는 세자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양주군 배봉산(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 위치. 서울시립대 뒤편에 있다)에 묘를 만들었다. 영조는 장례일에는 사도세자 묘를 찾았다. 삼년상을 치른 후에는 사당을 창경궁 홍화문 밖으로 옮겨서 수은묘(垂恩廟)라 했다. 
건릉. 정조와 효의왕후 합장릉.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왕릉 참배를 자주 했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해 소통하는 정치를 했다.

건릉. 정조와 효의왕후 합장릉.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왕릉 참배를 자주 했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해 소통하는 정치를 했다.

정조는 11살에 아버지가 할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끝내 유명을 달리하는 비극을 봤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이 있듯이, 정조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아버지가 찌는 듯한 무더위 아래 좁은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이 모습을 어린 나이에 지켜보는 것도 참혹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마지막 길도 배웅하지 못하게 했다. 영조는 손자 정조에게 훗날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존하지 말라는 잔인한 다짐까지 받았다.

 사도세자는 역적이라는 명분으로 죽었다. 정조는 역적의 아들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왕위를 잇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형식상 사도세자와는 무관하게 만들었다. 할아버지 영조는 83세에 세상을 떠나고, 그 자리에 정조가 올랐다. 정조 25살이었다.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했다. 아울러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수은묘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사당 수은묘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렸다. 아버지의 죽음에 늘 애통해하던 정조는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 왕릉은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규모로 지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시 노론의 흉계에 빠져 희생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슬픔이 컸다. 슬픔을 달래려고 아버지의 묘를 명당 수원으로 이장하고, 해마다 참배하고 화성을 건설했다. 한 많은 삶이었지만, 사후에 아들의 지극한 효성을 받았다. 

사도세자를 주제로 한 소설과 영화 시나리오. 내용은 사도세자의 탄생, 대리청정, 모함과 살해 등 그의 억울한 죽음을 다루고 있다.

사도세자를 주제로 한 소설과 영화 시나리오. 내용은 사도세자의 탄생, 대리청정, 모함과 살해 등 그의 억울한 죽음을 다루고 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모든 인간관계 중에서 으뜸이다. 부모의 사랑으로 자녀가 태어나고 성장한다. 이 관계에서 효는 중요한 생활의 가치다. 효는 간단히 말해서 부모를 섬기는 일이다.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었다는 사실만으로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은혜를 입은 것이다.  

유학에서 삶과 죽음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된 것으로 본다.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의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한다. 자식이 부모 사후에도 극진히 섬기는 것이 유교의 이념이다. 정조가 자신의 초상화를 현륭원 재실에 걸어 아버지를 곁에서 보양하고자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조의 현륭원 조성과 화성 건설은 모두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를 향한 정조의 마음은 죽어서 완성된다. 부모 옆에서 영원히 잠들게 된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 했으나 집권 노론 대신들이 극심한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정조의 애타는 한을 푼 사람은 고종이었다. 정조가 죽은 후 왕실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과 은신군의 후손으로 이어졌다. 그중에 사도세자의 현손자가 되는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종으로 추존했다. 융릉이라는 능호도 이때 내려졌다. 1901년에는 장조의황제로 높이면서 황제의 능이 됐다. 정조는 죽었지만, 그의 애틋한 마음이 후손에 의해 기억된 것이다. 

융건릉, 정조, 사도세자,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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