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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일년 농사 모내기하는 달
쌀 재고량 133만톤, '보릿고개' 넘긴 세대들은 격세지감이다
2021-05-24 16:08:00최종 업데이트 : 2021-05-24 16:09:08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우비를입고 이슬비를 맞으며모내기를하는 농부들

우비를입고 이슬비를 맞으며 모내기하는 농부들

 

봄이 되면 농촌에는 농부들의 일손이 바빠진다. 계절상으로 4월은 밭작물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심고 5월은 일 년 농사인 모내기를 하는 달이다. 20~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모내기에서부터 벼를 베고 탈곡하는 일까지 일일이 사람 손으로 다했다. 그러다가 70년대 최초로 농기구인 경운기를 개발해 농촌에 보급됐고 이어서 이앙기와 트랙터 가 개발되면서 정부가 농촌 현대화를 위해 농기구 구입 농가에게 정부 보조금과 융자금을 지원하면서 점진적으로 농촌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기계화 영농으로 트랙터로 논도 갈고 이앙기로 모내기를 하고 가을 추수도 트랙터가 벼를 베면서 탈곡을 하고 부대에 담아 부대를 꿰매는 일까지 다 한다. 그만큼 일이 빨라지고 인건비도 절약된다. 그러다 보니 농촌에 할 일이 줄어든 젊은이들이 일자리 찾아 도시로 나가면서 농촌은 점점 고령화되고 일손이 부족한 농가들은 메를 팔고 트랙터가 있는 농부들은 남의 논일도 하지만 논 100 마지기가 넘게 메(세를 얻어 농사짓는 것 )를사서 농사를 짓는 기업농가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필자는 농촌에 살다가 수원으로 이사와 20여 년 동안은 도심에 묻혀 살다 보니 언제 모내기를 하고 언제 추수를 하는지 관심없이 농촌일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왔다. 그런데 지난 21일 오후 2시경 수원역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방향으로 가면서 창밖을 보니 농부들이 옛날처럼 줄모를 심고 있다. 20여 년만에 보는 옛 추억거리 농촌 풍경이다.  그래서 모심는 곳을 가보려고 화서역서 내렸다.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약 2킬로쯤 걸어가니 서호 호수 제방이 나온다.

 

제방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논이 농촌진흥청 벼재배 시험 농장 이리고 한다. 기계화영농시대라 다들 이앙기(移秧機)로 모내기를 하는데 이곳에서는 20~30여 년 전 방식으로 농부들이 줄모를 심는다. 일부는 모가 심어져 있고 10명이 한 조가 되어 몇 개 팀으로 나누어 모내기를 하고 있다. 논둑 양쪽에서 두 사람이 못줄을 잡고 있다. 못줄에는 약 10cm 간격의 눈금 표시가 있어 눈금에 맞춰 모를 심어 가는 방식이다.

 

농사일은 본래 남성 농부들의 몫이었는데 이제는 여성 농부들이 모내기를 하고 남성 농부 둘이서 못줄을 잡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말해준다. 사진 촬영도 하고 농부들과 인터뷰도 하려고 갔는데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다. 제방 아래와 논둑 사이에는 약 2m 넓이의 배수로(配水路)가 있어 건너갈 수가 없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건너가는 길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농촌진흥청 시험재배농장이라 일반인은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멀리서 사진 촬영만 하고 돌아와 아쉬움이 남는다.

남성 농부는 못줄을잡고 여성 농부들이 모를 심는다

남성 농부가 못줄을 잡고 여성 농부들이 모를 심는다


모내기는 예부터 5월 10일경부터 심기 시작해  대부분 5월 말까지 끝낸다. 모내기 때는 일손이 부족해 학생들을 동원하기도 하고 집에서 일손을 도우라고 1~2일간 농번기 방학을 주기도 했다. 군 부대에서도 농촌 출신 군인들은 농번기 때 부모님 일손을 도우라고 휴가도 보냈다.

모내기를 할 때는 일꾼들을 잘 먹이기기 위해 반찬거리 장을 본다. 돼지고기에다 두부를 넣고 얼큰하게 찌게도 끓이고 꽃게젓도 담그고 갈치도 굽고 특별한 반찬을 만들어 점심을 들로 내간다. 일꾼들이 일청에서 하는 말이 "반찬을 보면 그 집 안인심(부인)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지나가는 과객을 불러 막걸리와 점심을 먹여보 내기도 한다. 이웃들을 불러 점심도 함께 먹는다. 살기는 어려웠어도 인심 만은 훈훈한 시절이었다.

 

농사를 많이 짓는 부잣집들은 열댓 명씩 일꾼을 사서 품삯을 주고 모내기를 하지만 대부분 농부들은 서로 품앗이(두레)로 모내기도 하고 가을걷이도 한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논 20마지기만 지어도 식구들 일 년 식량 걱정이 없으니 부잣집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 농민들은 논이래야 고작 5~10여 마지기 미만의 농사를 지었다. 본래 소유한 논이 아니었다. 해방 후 정부가 소작농들에게 농사지어 논값을 3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토지분배정책을 실시해서 생긴 논들이다.

 

소작농을 하다가 내  논이 생겼는데도 생계의 어려움은 여전했다. 당시에는 비료가 없으니 퇴비라고는 논두렁 풀을 깎아다 퇴비장을 만들고 인분을 찌틀어 숙성시킨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보니 논이 토박해 당시에는 논 1마지기당(200평) 농사를 지어봐야 쌀 1 가마 정도밖에 소출을 못했다. 가난한 집에 왜 그렇게 식구들은 많았는지 보통 6~7명이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의 일 년 식량이 부족했다.

 

겨울을 나면 봄에 식량이 떨어져 쌀 한 가마니 장리 쌀을 얻어먹으면 가을에 농사지어 한 가마 다 섯 말을 갚는  5할장리를 갚아야 하니 가난을 면할 길이 없었다. 그나마 장리 쌀조차 얻을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은 점심을 굶는 것은 일상적이고 저녁에도 쌀 한 줌에다 시래기를 잔득 넣고 멀겋게 끓인 죽으로 연명을 했다. 죽도 못 먹어 굶어 죽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때부터 '배곯아 죽는다'는 말이 생겼다.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보리가 누렇게 익는 6월까지기다려야 했다

5월인데도 보리가 파랗다.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보리가 누렇게 익는 6월까지기다려야 한다


'보릿고개'라는 말도 생겼다. 봄에 쌀이 떨어지고 보리가 익는 6월까지 배곯아 죽지 않고 버티어내야 한다는 생계가 어려웠던 시대를 반영한 말이다. 지금 80대 전후 노인들이 어릴 적 보릿고개를 넘기며 살아왔다. 60년대 후반 미국의 480 양곡(잉여농산물)인 밀과 밀가루 원조물자가 들어왔고 산업화 시대를 열면서 70년대부터 겨우 보릿고개를 면하게 됐다. 지금은 지력을 높여 벼의 성장을 촉진하는 비료와 품종개량으로 논 한마지기 당 쌀 다섯 가마니까지 소출을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0년도 쌀 생산량이 350만 7000톤이다. 쌀 재고량도 98만 톤(2000년 기준)이다. 매입 예정량 35만 톤(2021년 산)까지 총 133만 톤이 올해 재고량이다. 농식품부 양곡관리 예산 4천243억 원(2000년 기준) 원중 농협과 개인 창고업자에게 지출된 보관료만도 관리비 예산의 28,2%인 1천200억 원(2000년 기준)이다. 삼시세끼 끼니를 때울 식량이 없어 '보리고개'를 넘겨야만 했던 세대들은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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