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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봉수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2021-09-17 10:02:23최종 업데이트 : 2021-09-17 10:02:19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팔달산 화성장대에서 동쪽을 보면 화성행궁, 봉돈, 저멀리 석성산봉수도 보인다.

팔달산 화성장대에서 동쪽을 보면 화성행궁, 봉돈, 저멀리 석성산봉수도 보인다



지난여름 용인시에서 126년 만에 '건지산 봉수'를 발견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봉수에 관심이 생겼다. 특히 고향 땅에서 발견했다는 뉴스에 강한 호기심이 생겼고 어린 시절 뒷동산에서 놀던 생각이 났다. 그 뒷동산이 석성산이며 '석성산성'과 '석성산봉수'가 있는 곳이다. 동백지구가 들어서면서 고향은 가슴 속에만 존재하는 곳이 되었지만, 며칠 전 석성산을 답사해보니 어린 시절의 석성산 그대로이다.

수원화성 봉돈의 역할이 궁금해 선경도서관에서 봉수 관련 책을 몇 권 봤는데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화성성역의궤, 일성록, 한글 정리의궤에도 수원화성 봉돈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궁금증은 여전했다. 봉수를 공부하던 중에 봉수 전문가인 김주홍 박사를 알게 되었는데 최근에 저술한 '기전지역의 봉수'라는 책을 보내왔다.



수원화성 봉돈

수원화성 봉돈


이 책은 전체 7부로 구성되어있다. 1부는 봉화, 봉수의 기원과 개요를 소개하고 있다. 봉수(烽燧)란 봉(烽)은 횃불이고 수(燧)는 연기인데 국경과 해안의 안위 여부를 주변 고을에 알리면서 약정된 신호전달 체계에 의해 도성의 병조에 전하던 군사통신 수단이다. 봉수를 운용하고 관리하던 봉수군, 그들의 신분, 인원, 포상과 처벌은 어떻게 했는지, 호랑이의 습격에 어떻게 대비했는지 등의 내용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2부에서 6부까지는 제1거 노선부터 제5거 노선의 봉수 중 기전지역(경기도)에 소재하는 각 노선별 직봉과 간봉 및 관련 봉수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수원화성 봉돈과 관련해서는 제2거 노선의 '석성산봉수'와 제5거 노선의 '흥천산봉수'에서 수원화성 봉돈으로 이어진 '서봉산봉수'와 '건달산봉수' 관련 내용이 있다. 또한, 조선시대 문인들이 남긴 봉수 관련 한시를 발굴해 소개하고 있다.

 

한글 정리의궤의 봉돈 내도, 평상시에는 남쪽 첫번째 화두에서 횃불을 올렸고 평화의 상징이었다.

한글 정리의궤의 봉돈 내도, 평상시에는 남쪽 첫번째 화두에서 횃불을 올렸고 평화의 상징이었다



7부는 조선시대 전국 5개 노선의 봉수가 최종 집결하는 종착지의 봉수인 목멱산봉수를 소개한다. 목멱산(남산)은 봉수제가 운영되던 당시에는 각종 국가 제사의 거행장소였고 봉수제가 폐지된 후에는 일반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던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봉수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원시적인 형태의 봉화가 활용되었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조선시대 봉수제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태종 연간(1406년)부터 시행되었다. 봉수제는 1895년 5월 최종적으로 폐기됐다.

 

석성산봉수에서 서쪽을 보면 수원화성 봉돈이 보인다.

석성산봉수에서 서쪽을 보면 수원화성 봉돈이 보인다



조선시대 봉수 노선은 함경도 경흥 서수라보에서 출발해 양주의 아차산 봉수를 거쳐 목멱산 동쪽에서 첫 번째 봉수에서 받은 제1거, 경상도 동래 다대포에서 출발해 광주의 천림산 봉수를 거쳐 목멱산 동쪽 두 번째 봉수에서 받은 제2거, 평안도 강계 만포진에서 출발해 모악의 동쪽 봉수를 거쳐 목멱산 동쪽 세 번째 봉수에서 받은 제3거, 평안도 의주 고정주에서 출발해 모악의 서쪽 봉수를 거쳐 목멱산 동쪽 네 번째 봉수에서 받은 제4거, 전라도 순천 방답진에서 출발해 양천의 개화산 봉수를 거쳐 목멱산 동쪽 다섯 번째 봉수에서 받은 제5거가 있었다.

수원화성을 축성하고 봉돈이 생기면서 '수원화성 봉돈'은 한양의 '목멱산봉수'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대왕은 재위 중 수원에 13차례나 방문했다. 화성행궁에 머무를 때는 화성행궁이 곧 왕궁이기 때문에 국경의 정세를 봉수를 통해 보고받아야 했을 것이다. 경상도 상황은 제2거 노선인 '석성산봉수'의 신호를 받았고, 전라도쪽 상황은 제5거 노선인 '흥천산봉수'의 신호를 '서봉산봉수'를 통해 받았다.



용인 석성산봉수 터

용인 석성산봉수 터


봉수에서는 매일 한 번 봉화를 올려야 하므로 각종 시설과 재료 등의 비품을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거화시설은 연대, 연굴, 화덕 등이고 거화비품은 부싯돌 등이 있었다. 방호를 위해 조총 등을 가지고 있었다. 거화재료는 싸리나무, 소나무, 삼, 산솔갱이, 땔나무, 쑥, 풀과 말똥, 소똥, 닭똥 등을 비치하고 있었다.

용인 '석성산봉수'에서 수원화성 봉돈까지 직선거리로 약 13km 정도 된다. 석성산봉수에서 수원화성 봉돈으로 신호를 보내야 하는데 악천후로 연기나 불이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사람이 직접 뛰어가서 알려줘야 했다. 악천후 때마다 장거리 마리톤을 해야 하는 봉수지기들은 근무조건과 신분이 대단히 열악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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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봉수제, 수원화성 봉돈, 석성산본수,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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