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농업발전에 여생(餘生)을 바친 우장춘 박사를 아시나요?
2021-11-22 15:17:41최종 업데이트 : 2021-11-22 15:17:30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우장춘 박사가 개발한 배추

우장춘 박사가 개발한 배추



수원에는 조선시대에서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유적지가 있다. 그중 하나인 서호(西湖)와 둔전(屯田)은 농경문화의 진원지로 조선 후기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농업발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곳 서호공원 입구에는 환경감시 사무실이 있다. 3평 남짓한 사무실에는 항상 해설사가 대기하고 있다. 김병규(81세) 해설사를 만나보니 대한노인회 수원시 팔달구지회에서 해설 봉사활동(재능 나눔 활동 지원사업단)을 한다고 한다. 해설사는 정조의 서호 저수지 축조 이야기부터 박 대통령 시대의 진흥청 벼 시험재배 성공으로 보릿고개를 면하게 된 이야기, 그리고 우리나라 농업발전에 여생을 바친 우장춘 박사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정조가 농사철 가뭄에 대비해 만든 저수지

정조가 농사철 가뭄에 대비해 만든 저수지



서호는 수원 백성들의 농사철 가뭄에 대비해 정조 23년(1799년)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화성의 여기산 아래에 길이 1,246척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의 제방을 쌓고 수문 2개를 만든 거대한 인공 저수지다. 화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호(西湖)라 불렀으며 저수지 가운데 인공섬을 만들고 꽃과 나무를 심어 서호 낙조(落照)의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게 했다. 2005년 10월 17일 경기도 기념물 200호 로지 정 서호로 불렀으나 2020년에 공식 명칭 축만제로 환원됐다. 축만제(祝萬提)는 '천년만년 만석의 수확을 거두라는 의미'로 조선 후기의 농업생산기반의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정조시대의 둔전(논)은 박정희 정부 시대에 이르러 농촌진흥청 벼 재배 시험 답(畓)으로 벼 다수확 재배 시험에 성공 통일벼라 명명하고 농촌지도자 450명에 새마을교육을 실시 통일벼를 전국에 확산시켰다. 우리나라 1차 산업의 진원지로 통일쌀 증산정책으로 보리고개를 면하게 했고 경제발전의 지원지이기도 하다. 지금도 고품질의 쌀 생산을 위한 시험재배를 한다.

 

 

진흥청 벼 재배 시험논의 벼가 풍작을 이루고 있다

진흥청 벼 재배 시험논의 벼가 풍작을 이루고 있다



우장춘(禹長春) 박사는 건국 초기에 한국의 농업발전에 기여한 분인데도 우 박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1898년 4월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에 살다가 1950년 52세 나이로 조국 대한민국에 돌아와 농업발전에 여생(餘生)을 바쳤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아버지 우범선(禹範善) 씨와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6년 도쿄 제국대학 농학부에 입학해 1919년 졸업 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연구원으로 취직한다. 1936년 5월 '종의 합성(種의合性)'이라는 논문으로 도쿄 제국대학에서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후진 농업국인 우리나라는 농업발전을 위해 우장춘 박사 같은 농학자(農學者)가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우 박사는 정부의 요청에 의해 1950년 3월 8일 한국으로 귀국한 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농림장관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1950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설립 초대 소장, 53년 중앙 원예 기술원장, 58년 원예시험장을 지냈으며 농업과학자로서 육종(育種) 사업과 후진양성에 전념해 왔다.


특히 그는 수원에 수경시설을 만들고 '종의 합성(種의 合性)' 이론으로 일본의 재래종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한국 환경에 맞는 배추와 무를 개발했다. 강원도에 감자 우량종자를 개발하여 식량난을 해결하고 제주도에 감귤과 한라봉을 개발하기도 했다. 피튜니아 홑꽃을 화초용 접꽃으로 종자개량 등의 업적을 남겼다. 우 박사는 '씨 없는 수박' 개발로 널리 알려졌으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했다. 씨없는 수박은 일본 교토대 기하라 히토시 박사가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지병인 위와 십이장궤양으로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1959년 8월10일 61세로 서울에서 별세했다. 별세 3일 전인 8월 7일 병실에서 대한민국 '문화 훈포장'을 받았다. 우 박사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 조국이 나를 인정했구나!"라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아마도 조선을 배신한 아버지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것이 평생 마음에 짐이 되었던 모양이다. 묘지는 우 박사가 근무하던 옛 농촌진흥청 뒤 여기산에 묻혔다. 

그의 헌신으로 대한민국에 현대 농업기술이 시작됐고, 국민들은 기아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손 댄 우량 종자들은 외국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품질이라 하니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늦가을, 서호공원으로 나들이 계획이 있다면 해설사 설명을 통해 우장춘 박사의 업적을 들어보길 권한다. 

 

 

차봉규님의 네임카드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독자의견전체 0

SNS 로그인 후,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icon 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