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발전에 여생(餘生)을 바친 우장춘 박사를 아시나요?
2021-11-22 15:17:41최종 업데이트 : 2021-11-22 15:17:30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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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박사가 개발한 배추
정조가 농사철 가뭄에 대비해 만든 저수지
정조시대의 둔전(논)은 박정희 정부 시대에 이르러 농촌진흥청 벼 재배 시험 답(畓)으로 벼 다수확 재배 시험에 성공 통일벼라 명명하고 농촌지도자 450명에 새마을교육을 실시 통일벼를 전국에 확산시켰다. 우리나라 1차 산업의 진원지로 통일쌀 증산정책으로 보리고개를 면하게 했고 경제발전의 지원지이기도 하다. 지금도 고품질의 쌀 생산을 위한 시험재배를 한다.
진흥청 벼 재배 시험논의 벼가 풍작을 이루고 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아버지 우범선(禹範善) 씨와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6년 도쿄 제국대학 농학부에 입학해 1919년 졸업 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연구원으로 취직한다. 1936년 5월 '종의 합성(種의合性)'이라는 논문으로 도쿄 제국대학에서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후진 농업국인 우리나라는 농업발전을 위해 우장춘 박사 같은 농학자(農學者)가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우 박사는 정부의 요청에 의해 1950년 3월 8일 한국으로 귀국한 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농림장관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1950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설립 초대 소장, 53년 중앙 원예 기술원장, 58년 원예시험장을 지냈으며 농업과학자로서 육종(育種) 사업과 후진양성에 전념해 왔다.
그는 지병인 위와 십이장궤양으로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1959년 8월10일 61세로 서울에서 별세했다. 별세 3일 전인 8월 7일 병실에서 대한민국 '문화 훈포장'을 받았다. 우 박사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 조국이 나를 인정했구나!"라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아마도 조선을 배신한 아버지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것이 평생 마음에 짐이 되었던 모양이다. 묘지는 우 박사가 근무하던 옛 농촌진흥청 뒤 여기산에 묻혔다. 그의 헌신으로 대한민국에 현대 농업기술이 시작됐고, 국민들은 기아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손 댄 우량 종자들은 외국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품질이라 하니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늦가을, 서호공원으로 나들이 계획이 있다면 해설사 설명을 통해 우장춘 박사의 업적을 들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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