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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과 강화도 정족산성
수원화성 치성은 고조선 산성에서 유래
2022-05-16 11:22:27최종 업데이트 : 2022-05-16 11:22:25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강화도 정족산성, 처음 축성된 것은 4천년 전으로 추정된다.

강화도 정족산성, 처음 축성된 것은 4천년 전으로 추정된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수원화성에 대해 수원시에서는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 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 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당대 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라고 설명한다.
 

강화도 정족산성 동문, 막돌로 쌓은 돌기둥 위에 벽돌로 홍예를 틀었다.

강화도 정족산성 동문, 막돌로 쌓은 돌기둥 위에 벽돌로 홍예를 틀었다.



수원화성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수원화성을 설명하면서 "수원화성 시설물 중에서 이러한 구조는 오로지 수원화성에만 적용된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기법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성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러한 설명을 들으면 수원화성이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과 서양의 축성기법이 적용되어 모든 성곽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수원화성은 전 세계에 축성된 성 중에서도 가장 늦은 시기인 1796년에 축성되었기 때문에 축성 당시에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등 우리나라 성곽의 장단점을 면밀하게 연구했고 동서양의 성제도 비교 검토해 당대에서는 가장 완성도 높은 성이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수원화성이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튼튼하고 우수한 성이다"라는 식의 접근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강화도 정족산성에는 4곳에 치가 남아있다. 곡성 형태의 치 모습.

강화도 정족산성에는 4곳에 치가 남아있다. 곡성 형태의 치 모습.



문화재를 비교해 장단점을 분석하는 것은 괜찮지만 우열을 따지는 것은 '문화 상대주의' 측면으로 봤을 때 위험한 생각이다. 문화재 비교 답사는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며, 보다더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조금 더 안목이 생기면 시대적 특징도 눈치챌 수 있으며 그 시대, 그 나라만의 전통도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성곽 유적이 많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답사를 통해 비교할 수 있다.

18세기에 축성된 수원화성과 그 이전에 축성한 우리나라의 성을 비교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직접 답사를 통해 성이 위치한 자연적인 조건, 성벽을 구성하는 돌의 모양, 축성기법 등을 면밀하게 관찰하면 우리나라 성곽의 오랜 전통이 수원화성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수원화성 서북각루에서 바라본 서1치, 서북각루에서 팔달산 정상 방향으로 있다.

수원화성 서북각루에서 바라본 서1치, 서북각루에서 팔달산 정상 방향으로 있다.



최근에 강화도에 있는 정족산성(삼랑성)을 답사했다. 정족산성은 능선과 계곡을 휘감아 축조한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2.3km이다. 4천 년 전 고조선 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동문과 서문은 막돌로 쌓은 돌기둥 위에 벽돌로 홍예를 틀었고 4곳에 치가 남아있다. 인터넷을 통해 정족산성을 검색해보니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하여 쌓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조선의 산성으로 병인양요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이다' 등 전설로 치부하거나 간단한 내용만 나왔다.
 

수원화성 서북각루와 서1치, 왼쪽이 서북각루 오른쪽이 서1치.

수원화성 서북각루와 서1치, 왼쪽이 서북각루 오른쪽이 서1치



인하대 남창희 교수는 동북아 고대 산성을 비교 연구하는 과정에서 정족산성의 구조와 위치를 군사학적으로 검토한 결과 축성 시기를 고조선 초기인 4천 년 전으로 추정했다. 놀랍게도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삼랑성은 조선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았다"고 기록했다. 이암(1297-1364)이 지은 '단군세기'에는 '단군의 셋째 아들 부우를 강화에 보내 전등산에 삼랑성을, 마니산에 제천단을 쌓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조선 문명의 기원으로 알려진 요하문명(B.C 7000) 발굴과정 중 '하가점하층문화(B.C 2300 – B.C 1600)'에서 치를 갖춘 석성이 발굴되었다. 치를 갖춘 성은 고조선 성곽의 특징이었다. 치의 전통은 고구려로 이어졌고 고구려가 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치를 갖춘 석성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고구려 석성의 치는 고구려와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패배했던 중국에서도 모방했고 우리나라 성의 전통이 되었다.


수원화성 서1치. 수원화성에는 10개의 치가 만들어졌다.

수원화성 서1치. 수원화성에는 10개의 치가 만들어졌다


수원화성에는 서 1치, 서 2치, 서 3치, 남치, 동1치, 동2치, 동3치, 북동치, 용도동치, 용도서치 등 10개의 치(雉)가 있다. 치란 성벽을 돌출시켜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전면과 좌우 양 측면, 즉 3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만든 시설물이다. 치는 성을 방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화재 비교 답사를 통해 성곽의 중요 시설인 치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 수원화성 치의 전통은 중국 성에서 모방한 것이 아닌 고조선 성곽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수원화성을 답사하면서 치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간단하게 성벽을 돌출시켰을 뿐이지만 이러한 독창적인 시설이 역사를 바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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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정족산성, 고조선 산성, 치성, 요하문명,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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