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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성벽은 어떻게 생겼을까?
돌의 뒤 뿌리가 길어 구조적으로 안정
2023-05-26 09:36:55최종 업데이트 : 2023-05-26 08:44:12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수원화성 성돌, 서암문과 서포루 사이에 사용했던 원래의 성돌이다.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수원화성 성돌, 서암문과 서포루 사이에 사용했던 원래의 성돌이다.


수원화성은 1794년 1월 7일 돌 뜨는 공사를 시작하고 25일부터 성터를 닦았다. 2월 28일부터 장안문, 팔달문, 화홍문, 남수문 지을 터를 닦으며 본격적으로 축성을 시작했다. 1796년 9월 10일 성 쌓는 공사를 마쳤고 19일 성신사의 위판을 만들었다. 10월 16일 화성행궁 낙남헌에서 준공 기념식인 낙성연을 열고 공식적인 수원화성 축성을 완료했다.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수원화성 성돌, 서암문과 서포루 사이에 사용했던 원래의 성돌이다.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수원화성 성돌, 서암문과 서포루 사이에 사용했던 원래의 성돌이다.



수원화성은 축성 이후 잘 관리되다가 1848년의 홍수로 화홍문, 남수문 등이 크게 무너지고 다른 시설물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모두 수리했다. 나라가 존재하고 있을 때는 우리의 문화재도 건재했지만,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대부분의 시설물이 방치된 가운데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의 사진을 보면 장안문 좌우에 있는 북서포루, 북동포루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1940년 촬영한 '수업료'라는 영화 속에 북서포루가 나오는데 무너져내린 성벽과 북서포루 모습이 나라를 잃은 슬픔 만큼이나 처연하게 나온다.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수원화성 성돌, 서암문과 서포루 사이에 사용했던 원래의 성돌이다.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수원화성 성돌, 서암문과 서포루 사이에 사용했던 원래의 성돌이다.



일제강점기에 살아남은 시설물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성벽도 곳곳이 무너졌고 장안문, 창룡문, 포루, 각루 등도 대부분이 무너졌다. 이때까지 살아남은 시설물인 팔달문, 화서문, 서북공심돈, 방화수류정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수원화성은 어린이들의 놀이터였다. 특히 동쪽 성벽은 무너진 곳이 많아 아이들이 놀기에 좋았다. 방치되던 수원화성은 1975년이 되어서야 복원이 시작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수원화성 성돌, 돌의 뒤 뿌리가 긴 모습을 볼 수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수원화성 성돌, 돌의 뒤 뿌리가 긴 모습을 볼 수 있다.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후 전문가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성곽시설로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군사적인 성격, 정치적인 성격, 역사 문화적 가치 등을 연구하는 붐이 일어났다. 화성성역의궤 번역본이 보급되면서 수원화성은 우리나라 성제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고대로부터 성을 쌓을 때는 기초공사를 충실하게 했다. 고구려 산성의 경우에도 땅을 1m가량 판 후 자갈과 진흙을 섞어서 지면까지 층층이 다진 후 기단부는 큰 돌로 받친 후 그 위에 성벽을 쌓았다. 수원화성은 어떻게 쌓았는지 성벽의 구조를 알아보겠다.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수원화성 성돌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수원화성 성돌



화성성역의궤 어제성화주략에 '터를 쌓는 데 관한 것'에서 궁실을 짓고 성곽을 쌓는 데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터를 다지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터가 견고하지 않으면 조각한 담장과 분칠을 한 첩이 비록 아름답다 한들 어찌 의지할 수 있겠는가. 성 터를 따라 너비 약 1장(약 3m)쯤으로 돌 놓을 자리보다 넓게 하고 깊이는 4척(약 1.2m)으로 얼어붙는 지점보다 깊이 파서 냇가의 조약돌로 구덩이가 평평하게 메워질 때까지 달구질하여 단단하게 다지면 확고부동한 터가 만들어진다고 했다.

수원화성 축성 당시의 성벽 원형이 일부 남아 있는 장안공원 성벽, 바늘끝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맞물려 쌓았다.

수원화성 축성 당시의 성벽 원형이 일부 남아 있는 장안공원 성벽, 바늘끝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맞물려 쌓았다.



'성제'에 대해서는 성이 무너지기 쉬운 것은 그 배가 부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성의 높이를 3등분 하여 성을 쌓을 때 아래의 3분의 2까지는 점점 안으로 좁혀 매 층의 차를 1촌(약 3cm)으로 한 비례로 좁히고 위의 3분의 1에서부터는 점점 밖으로 넓히는 듯이 하되 매 층의 차를 3푼(약 1cm)쯤으로 하면 된다. 성의 전체의 모양이 가운데쯤이 약간 굽은 듯이 보이는데 마치 홀과 같은 모양으로 아래의 차는 돌층계처럼 안으로 좁아 들어 무너질 리가 없게 되고 위의 차는 처마 같아 뛰어넘을 수 없게 된다.

수원화성 축성 당시의 성벽 원형이 일부 남아 있는 장안공원 성벽, 바늘끝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맞물려 쌓았다.

수원화성 축성 당시의 성벽 원형이 일부 남아 있는 장안공원 성벽, 바늘끝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맞물려 쌓았다.



수원화성을 답사하다 보면 어떤 곳도 홀처럼 생긴 곳이 없다. 들여쌓기를 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축성 당시에 성벽의 원리를 축성 현장의 기술자들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 이거나 복원 당시에 들여쌓기를 하지 않은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수원화성 성벽은 대성석(뒤의 길이 3척 5촌, 모서리 2척, 108cm, 62cm), 중성석(길이 3척, 모서리 1척 8촌, 93cm, 56cm), 소성석(길이 2척 8촌, 모서리 1척 5촌, 87cm, 47cm)으로 치석한 돌을 길이로 세워서 배열하여 쌓아 그 뿌리가 깊게 하였다. 다음에는 자갈을 뿌리 둘레에 쌓고 몽둥이로 바수어 굳게 다져서 돌 사이의 틈을 채웠다. 다음에는 또다시 자갈을 다져서 두께가 반 장(약 1.5m) 정도로 쌓아 올렸다. 다음에는 또 흙으로 겹쳐 쌓는데 이것이 내탁인 것이다.

'수원성복원 정화지'에 실린 수원화성 성벽의 구조, 단면도를 통해 성벽의 전체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수원성복원 정화지'에 실린 수원화성 성벽의 구조, 단면도를 통해 성벽의 전체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수원화성 성벽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성벽의 단면을 보아야 하는데 어디에서도 실물을 볼 수는 없지만 '수원성 복원정화지', '장안문 여장잇기공사 수리보고서'에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수원화성 서암문과 서포루 사이의 성벽 축성에 사용했던 돌을 전시하고 있다. 이 돌을 통해 돌의 뿌리가 길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성벽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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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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