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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역사박물관에서 '선사시대부터 60년대 수원'을 만나다
수원의 역사 속 유물 재현
2024-05-09 09:42:56최종 업데이트 : 2024-05-09 10:27:40 작성자 : 시민기자   김청극
우리 고장 수원을 만나다.수원 박물관 전경

우리 고장 수원을 만나다.수원 박물관 전경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곳, 도시와 자연이 함께 하는 곳, 인심이 넘치고 정겨운 사람들의 이야기로 웃음 짓게 되는 곳...' 이는 매력 넘치는 수원을 일컫는 말이다.

인구 119만 7천 명(출처: KOSIS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 기준)이 거주하는 이곳이 1945년 8월 15일 수원시로 승격된 지 올해 80여 해가 됐다.

1967년 6월 23일 경기도청이 인천에서 수원으로 이전하며, 수원은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 인구 100만 명이 넘는 특례시가 됐다. 수원의 지나온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보기 위해 지난 주말 수원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수원역사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1960년까지 수원의 역사와 유물을 재현한 공간이다. 상설 전시가 열리고 있어 누구든 관람이 자유롭다. 방문객들의 출입이 뜸한 시각, 3층 상설전시장 입구에서 발을 멈췄다.

선사 시대부터 60년대까지의 수원을 소개하고 있다.

선사 시대부터 60년대까지의 수원을 소개하고 있다.


수원역사박물관 전시 자료를 보니, 수원의 자연환경과 선사시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수원, 조선시대의 수원 등 시대별로 공간이 나뉘었다. 수원의 물과 길, 60년대 수원 만나기 등의 순서였다. 필자는 수원에서 40년 이상을 거주하며 대여섯 번 이사를 다니는 동안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접했다. 하지만 이처럼 자세하게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우선 수원 지명의 변화가 흥미로웠다. 수원은 마한의 모수국(모수: 못, 물)이었다가 각각 백제, 고구려, 신라의 지배를 거친 삼국시대에는 매홀(물골)이라 불렸다. 남북국시대의 경덕왕 이후의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에 수성, 수주(水州,물고을)를 거쳐 조선시대에 수원(水原)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됐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시대 유적과 유물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


수원은 '물의 원천'으으로, 1년 중 가뭄이 생기거나 홍수가 나서 어려움을 다하는 적이 없는 선택 받은 땅임에 틀림없다. 수원의 자연환경을 소개할 때 수원의 물을 빼놓을 수 없다. 광교산의 산세와 수원천의 맑은 물, 원천천을 비롯하여 황구지천에서 합류하여 안성천을 거쳐 서해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수원의 대표적인 민속은 흥미거리였다. 대표적 민속놀이인 토당굿, 고색동 줄다리기, 길마재 줄다리기, 장치기 놀이, 화홍 문답교 놀이를 알 수 있었다. 
 
수원의 유명한 남문 지역의 극장 포스터

수원 남문 지역의 극장 포스터
60년대 수원의 모습을 재현한 것에 호기심이 생겨난다. 60년대 수원의 모습을 재현한 것에 호기심이 생겨난다.


'60년대 수원 만나기' 코너로 향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극장 간판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학창시절 극장 간판만 보아도 공연히 설레었다. 그 앞에 담배 가게와 다방이 아주 정겹다. 맞은 편에는 양복점인 태창라사, 지금은 양복을 맞춰 입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당시 양복 맞추는 일은 대단한 일이었다. 거의가 단벌 신사였으니 얼마나 양복을 아껴 입었나? 그 당시 양복이 한 번에 제작되지 않아 가봉을 하고 몇 번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대중 목욕탕과 이발소가 정감이 간다.

대중 목욕탕과 이발소가 정감이 간다.


태창라사 그 옆에는 <예쁘다 양장점>이 들어서 있다. 양장점 가는 일도 큰 맘 먹어야 가는 것이 가능했고 커다란 희망사항이었다. 영어 대문자로 'DRESS MAKER'로 쓰여 있으니 그래도 이름있고 소문난 양장점 같다. 

당시 껌은 대중적인 필수품에 가까웠다. "화란 나르당의 천연향기!" 화란은 네덜란드의 옛 이름이고 나르당은 회사 이름이다. "아빠도 나도 해태 껌!" 퇴색된 포스터 그림과 글씨가 오히려 정감이 더 간다. 그 옆의 칠성 사이다의 광고가 있다. 지금도 칠성 사이다는 이름있는 유명한 브랜드이다. 사이다가 흔하지 않았던 가난했던 시절이 생각난다. "불온삐라를 보면 즉시 신고합시다" 워낙 전단지(삐라)가 많이 살포되던 시절이어 전단지를 많이 주어오면 학교에서는 큼직한 상품을 주곤했다. 그 옆에는 우체통까지 마련해 놓았다.
 
지금까지도 명성이 높은 소문난 화춘옥 식당

지금까지도 명성이 높은 소문난 화춘옥 식당


공설 목욕탕과 공설 이발관, 여기에 수원에서 소문난 화춘옥이 정감있게 다가온다. 유명했던 음식점으로 지금도 화춘옥(華春屋)의 간판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 수인선의 역사를 빼놓고서는 수원 교통의 역사를 말하기 어렵다. 당시 실물을 그대로 옮겨놓아 직접 열차에 앉아 보았다. 당시 열차가 너무 작고 볼품없었지만 서민들은 가장 귀한 교통수단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일제는 1930년 여주와 이천에서 생산되는 쌀을 수탈하려고 수려선을 개통했고, 1937년 서해안의 천일염 또한 수탈 목적으로 수원과 인천을 잇는 수인선을 개통했다. 이처럼 교통망을 통해 슬픔이 서린 역사와 동시에 서민들의 애환을 엿볼 수 있다.

수인선 열차 내부의 모습이 보인다.

수인선 열차 내부의 모습이 보인다.


가파른 근대를 넘어 근대 수원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전통적인 대 도회지(都會地)의 성격이 보다 강화되었다. 이처럼 수원역사박물관에서는 격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넘어 겪어온 수원 사람들의 삶을 다양한 유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지금의 새로운 세대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과거의 사실을 수많은 유물을 통해 배우고 체험하는 것이 매우 소중한 산 공부라는 생각이 든다.

<수원박물관 관람 안내>
○운   영: 화~일요일 9:00~18:00 (오후 5시까지 입장 가능/매주 월요일 정기휴관)
○관람료: 성인 2,000원/청소년 및 군인 1,000원/어린이 및 노인 무료입장
※ 수원시 공식 카카오톡 친구 추가 시, 무료 입장
○누리집: 수원박물관(https://swmuseum.suwon.go.kr/)
○문   의: 031-228-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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