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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효자 ‘최루백과 정조’ 이야기
효의 도시 정체성을 띠고 있는 현장을 찾아
2025-05-02 13:11:18최종 업데이트 : 2025-05-02 13:11:17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화성시 봉담읍 '최루백 효자비각'. 화성시는 고려 시대에는 수원시였다.

화성시 봉담읍 '최루백 효자비각'. 화성시는 고려 시대에는 수원시였다


  도시는 지역 역사와 정체성을 상징하는 문화를 찾기에 노력하고 있다. 도시의 독특한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시민의 삶에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문화가 되길 바란다. 문화적 사유와 성찰로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작업은 미래까지 이어나갈 수 있는 가치가 있다. 
  수원의 정체성 중에는 효의 도시를 들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시민으로서 도시의 주인이 되어 본 적이 드물다. 지역 축제를 해도 구경꾼일 수밖에 없다. 효는 저마다 해석하고, 의지를 표현할 수 있어 주인공이 된다. 이런 전통은 시민의 존재감과 효능감을 지속해서 키워 왔다. 좋은 마음은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듯, 수원 시민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우리라는 공동체 인식도 담고 있다. 

수원박물관에 《오륜행실도》로 효자 최루백 이야기가 있다. 정조의 명을 받아 엮은 책이다.

수원박물관에 《오륜행실도》로 효자 최루백 이야기가 있다. 정조의 명을 받아 엮은 책이다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 165-1에 가면 '최루백 효자비각'이 있다. 비각 글에 "조선 세종 때 편찬된 《삼강행실도》에는 최루백이 15살 때 아버지가 사냥하러 가셨다가 호랑이에 물려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그 호랑이를 잡아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하여 홍법산 서쪽에 장사 지낸 후 여막을 짓고 무덤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최루백은 수원의 호장을 지낸 수원 최 씨 시조 최상적의 아들이다. 호장은 향리 우두머리다. 화성시는 고려 시대에는 수원시 행정 중심지였다. 해서 최루백의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본관을 수원으로 했다. 아버지 원수를 갚은 효행이 전해져 조선 숙종 때 최루백 효자 정려를 세웠다. 원래 봉담읍 수기리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그의 묘소와 비각이 있는 분천리 일대는 당시 최루백에게 하사했던 땅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수원 최 씨 사적지'가 있는데, 제법 널찍하게 차지하고 있다. 
 
효원공원에 효 권장비. 정철의 '훈민가'를 새겼다.

효원공원에 효 권장비. 정철의 '훈민가'를 새겼다


  효자 최루백 이야기는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삼강행실도》 등 여러 문헌에 기록되었다. 수원박물관에는 오륜행실도가 있는데 정조의 명을 받아 엮은 책이다. 여기에도 최루백의 효행 이야기가 있다. 수원박물관에는 최루백의 부인 염경애 묘지석도 있다. 아내의 삶을 회고하며 묘지명을 지었다. 
  수원 효자는 정조도 빼놓을 수 없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명당에 모시기 위해 수원으로 왔다. 수원 도읍이 있는 화산 아래로 현륭원을 조성했다. 특히 선대 임금 세조는 왕릉에 대한 치장을 간소화하라고 했지만, 정조는 남다른 정리가 있다면서 석물을 제대로 설치했다. 
 
지지대 고개에 있는 지지대 비각과 설명글.

지지대 고개에 있는 지지대 비각과 설명글


  수원부는 팔달산 아래로 옮겼다. 그리고 화성을 건설하고 행궁도 지었다. 아버지 묘소 현륭원을 찾기 위한 장소였다. 정조는 재임 기간 현륭원을 13차례 행차했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수원을 벗어나 한양으로 갈 때 고갯길은 더디기만 했다. 그게 지지대 고개다.
  정조는 1795년 을묘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에 왔다. 수원 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 회갑 잔치를 정성으로 치렀다. 당시 어머니를 위해 한글본 채색도 '정리의궤'를 만들었다. 이는 원래 이름이 '뎡니의궤'인데,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제작한 정조시대 유일한 채색본이다. 
  정조의 마음은 후손들도 감동했다. 1807년에 세운 지지대비가 그것이다. 정조대왕은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만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무덤을 볼 수 없게 되므로, 언제나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었다는 글이 쓰여 있다. 높은 고개에 지지대비각은 자연 풍경 속에 다소곳이 있다. 정조가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효행공원 내에 있는 정조대왕 동상.

효행공원 내에 있는 정조대왕 동상


  건너편 프랑스 참전 기념비가 있는데, 그 근처에 효행 공원이 있다. 광교산 자락에 작은 공원인데 정조 동상도 있고, 효행 탑도 있다. 수원에 효를 테마로 조성된 공원은 인계동에 효원공원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는 조각상과 기념물이 있다. 효녀 심청이를 주제로 한 벽화 장식도 있다. 팔달산에는 '효원의 종', 길 이름에 효원로, 버스 정류장에 효자문 사거리, 다리 이름에 효자교 등이 있고, 학교 이름에 '효성, 효원, 효천, 효동, 효정' 등이 있다. 
  사실 효는 명확한 형태가 보이지 않는 담화 구조의 서사다. 그런데 수원은 다르다. 수원의 얼굴 같은 곳에 지지대비각 유물이 있다. 수원과 지리적 맥락이 닿아 있는 화성에 최루백 이야기도 효행을 구체화하는 산물이다. 이 유산이 밑바탕이 되어 삶의 터전에는 다양한 효의 시각적 상징이 부화했다. 모두가 선조가 좋은 이정표를 남겨준 덕이다. 
윤재열님의 네임카드

도시, 수원, , 정체성, 정조, 최루백,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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