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동북공심돈, 봉돈 내부는 어떤 모습일까?
(사)화성연구회 모니터링 활동
2025-05-15 14:59:55최종 업데이트 : 2025-05-15 14:59:54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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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화성 동북공심돈 (사)화성연구회 5월 모니터링은 수원화성 동북공심돈에서 시작해 동북노대, 창룡문, 동포루, 동1포루, 봉돈을 둘러봤다. 평상시에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는 동북공심돈, 동포루, 봉돈은 최소한 1년에 한 번씩은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지난 13일 오후 2시 수원화성 동장대 앞에서 모여 동북공심돈으로 이동했다. 동북공심돈 외부 벽돌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틈이 벌어지고 있다. 관계기관에서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실시하고 있지만, 상태는 계속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 동북공심돈 밖에 국도가 지나고 있어 많은 교통량으로 인해 진동이 성곽에 영향을 주고 있다. 장기적인 대책으로는 진동을 흡수하는 포장이 필요하다. ![]() 수원화성 동북공심돈에서 바라본 풍광 동북공심돈, 봉돈 등 출입이 통제되는 시설에 들어갈 때는 화성사업소 협조를 얻어 모니터링을 한다. 1년 만에 들어간 동북공심돈 내부는 벽돌에 금이 가거나 작게 부서진 파편들이 많아졌다. 총안에도 파편들이 즐비했고 바닥에도 벽돌 조각들이 많았다. 건물 기둥 하부가 썩어 보수가 필요해 보였다. 모니터링 후 동북공심돈에 대해 설명을 했다. "동북공심돈에 대해 화성성역의궤는 '요동에 있는 계성의 평돈을 본떠서'라고 기록했고, 한글 정리의궤는 '요동과 계주 사이의 들 가운데 있는 평돈을 조금 모방하여 벽돌로 둥글게 쌓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중국 순천부 완평현의 계성에 있는 돈으로 보입니다. 계주(薊州)는 현재 북경 근처입니다." ![]() 수원화성 동북공심돈 내부모습 1797년 1월 29일 정조대왕은 수원화성 축성이 완공된 이후 처음으로 수원화성을 둘러봤다. 화양루 북쪽에서 시작해 화서문을 지나 서북공심돈 앞에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공심돈은 우리 동국의 성제에서는 처음 있는 것이다. 층계가 우회하여 어가가 올라가기 불편하니 보고 싶은 신하들은 머물렀다가 들어가 구경하고 오라. 다만 초루나 돈대 등은 이따금 불필요하게 힘을 쓴 곳이 있어 기교를 부린 데 가까우니 본 취지에는 대단히 맞지 않는다. 이는 유수 조심태가 도청 이유경과 논쟁하다가 결국 도청의 주장에 따라 시행하게 되었지만, 나의 본뜻과 크게 다르다."라고 말했다. 1797년 8월 18일 기록에 채제공과의 대화 내용이 있는데 채제공이 공심돈 등 여러 곳을 올라가 보았는데 층계가 구불구불하게 나 있으니 제도가 매우 기이하고도 교묘하고, 위에 올라가 보니 적을 엿보기에도 편리하면서 성첩의 미관까지 해치지 않는다고 하자, 정조대왕은 이유경이 만든 것으로 모두 중요치 않은 곳에 힘을 들인 것이라고 말한다. ![]() 수원화성 창룡문에 있는 장용영 표석 이런 기록으로 봤을 때 정조대왕은 공심돈이 동국의 성제에 처음 있는 것이라고 해서 자랑스럽게 본 것이 아니고 못마땅하게 본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약용의 설계에 공심돈이 없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당시의 성제나 무기체계를 고려해 그렇게 생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북공심돈에는 철학적 원리가 숨겨져 있음이 한글 정리의궤에 나온다. 동북공심돈의 제도는 서북공심돈에 대하여 하나는 모지고 하나는 둥근 것은 천지의 방원(方圓)을 본받음과 같고, 가장자리로 두 번 돌아 가운데 뿌리가 서 있음은 태극의 동정을 형상함과 같다. 집을 두 칸으로 만든 것은 일월을 응한 듯하고, 총안을 돌아가며 뚫음은 모든 별이 북극성을 향하여 모이는 것과 같다고 했다. ![]() 수원화성 봉돈 창룡문 주변 성가퀴는 최근에 보수작업을 해 말끔해 보였다. 다만 답사로 중간중간이 갈라지고 턱이 져 안전사고 위험이 있어 보였다. 동1포루 앞에는 장용영 표석이 있다. 이 표석은 장용영 군사들의 위치를 표시한 것으로 수원화성에는 전체적으로 16개가 있었지만, 현재는 7개가 남아있다. 정조대왕 행차로에 있던 필로석과 마찬가지로 문화유산의 가치가 있는데 방치되어 있어 안타깝다. 수원특례시에서는 표석을 일괄적으로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 봉돈에 들어가니 마당에도 벽돌 틈에도 잡초가 많았다. 벽돌 사이에 있는 풀을 뽑고 봉돈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조선시대에는 5개의 봉화 노선이 있었다. 남쪽에서 두 개 노선, 북쪽에서 세 개 노선이 서울의 남산으로 모였다. 평상시에는 1개의 화구에서만 불이나 연기를 피웠다. 특별한 일이 없고 평화로운 하루였다는 표시이다. ![]() 수원화성 봉돈 내부 잡초 제거 수원에 화성행궁이 생기면서 동쪽으로 올라가던 봉화와 서쪽으로 올라가던 봉화의 신호를 봉돈에서 받았다. 동쪽으로 올라가는 석성산의 봉화 신호를 받았고 서쪽으로 올라가는 흥천대 봉화 신호를 서봉산에 간봉을 세워서 신호를 받았다. 회원들은 수원화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시간을 투자해 모니터링을 한다. 수원화성을 지킨다는 진정성과 자부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앞으로도 모니터링은 계속 이어진다. 수원화성이 잘 보존되고 문제가 있는 것은 개선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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